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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Oct 07. 2020

<보건교사 안은영> 후기

외로운 싸움에 연대를

** 결말이나 줄거리를 암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다. 여성 주연으로 이런 다양한 장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오락 생활의 질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모른다. 드라마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원 작가나 감독의 의도나 해석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볼 수 있는 사람들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예술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면 길거리에 있는 이상한 간판 디자인에 고통을 받을 것이고, 예민한 인권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차별과 억압에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세계, 이를 보는 것이 그런 예민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만 잘 보이는 소위 젤리의 세상은 부조리, 아픔, 욕망, 어둠 이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만연하지만 예민한 사람들에게만 포착되는 구조적 균열. 부조리-불균형, 세상의 어둠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1) 이를 이용해서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 (2) 그 부조리와 싸우는 사람들. 사회에 어떤 현상이나 변화가 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둘로 나뉜다. 그 구조의 불합리를 지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구조와 변화를 잘 타서 내 한 몸 잘 살아보려는 사람들. 내 한 몸 잘 살겠다는 욕망을 어찌 탓하겠냐만, 어쨌든 그 수에 있어서 세상은 후자가 압승이다. 이 사람들은 전자가 조용히 있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들에게 협조하길 바라기도 한다. 안은영, 그리고 안전한 평화. 사실 평범한 사람들은 안전한 평화에 가깝다. 젤리를 본다고? 그럼 그걸 팔아서 돈 벌어서 잘 살아봐야지. 그걸로 한 탕 땡겨봐야지. 이러한 소망들이 조직을 이루게 되어 힘 대결이 되기도 한다. ‘그래 어차피 다 경쟁하는데 내 손에 힘이 들어오는 것이 저쪽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라고 생각하면서.


외로운 싸움

그래서 기본적으로 안은영의 싸움은 외로운 싸움이다. 사실 그렇다. 눈에 젤리가 보이는 것은 운명이지만,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안은영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대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부조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들을 그냥 저버릴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안은영. 영웅은 이러한 연민으로부터 탄생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선택할 수 없는 사항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볼 줄 모르면 내 몸 하나는 편하련만. 그렇게 잠시 잃어버린 시각은 이때까지 잠시도 쉴 수 없었던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해 준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눈을 뜨고, 안은영은 다시 (장난감) 칼을 든다. 개인적으로 다시 젤리를 보게 된 안은영이 느끼는 깊은 절망, 그러면서도 다시 뛰게 되는 모습이 벅찼다. 어차피 싸울 거니까, 명랑하게 가자는 친구의 말대로 안은영은 그렇게 명랑하면서도 아프고 외로운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로움과 아픔을 겪는 다른 동료에게는 새 삶을 주고 싶어 하면서.


작은 위로와 연대

하지만 안은영에게도 보조배터리 동료(?)가 있다. 그 사람이 젤리를 보는 것은 아니어도, 보호막까지 있어 다칠 일도 적은 에너지원 동료(?)이다. 이뿐만 아니라 옴 잡이, 해파리, 그리고 또 다른 안은영의 친구들. 세상을 향해 외롭게 싸우지만 그는 그래도 친구들이 있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을 것이다.

전 이사장인 할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은 기성세대를 상징하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미래 세대를 보여준다. 기성세대의 탐욕이 부른 재앙은 결국 미래 세대인 아이들을 덮치고, (그 과정에서 학교에 고래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저버릴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그 선두를 맡는다. 할아버지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그 손주와 함께.


초조한 그들의 웃음

보건교사 안은영이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기 시작할 때, 그분들은 그렇게 그것을 검열해야 했나 보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자동완성 검색어에는 ‘보건교사 안은영 페미’가 올라와있었다. 일단 <보건교사 안은영 > 자체는 여러모로 분명 좋은 시도이며 여성 작가와 감독, 서사 또한 여성 주연이라는 점, 그 여성이 영웅으로 등장하며 과한 성적 대상화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 굉장히 의의가 있지만, 내 기준에서는 굉장히 도전적인 의제를 다루는 ‘매운맛 페미니즘’까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의 향기가 나면 낙인을 찍어야 해서 그렇게 열심히 검색을 하신 것 같다.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부조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이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매우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페미니즘을 평가 절하하거나, 낙인찍거나, 농담거리로, 해프닝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취한 방법 중 하나는 ‘웃음’이다. 여성들이 또 새롭게 발견한 부조리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위해 수많은 남초 사이트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뭐? 이것도 여혐이라고? 진짜 웃기다’며 희화화하는 데에는 사실 그들의 초조함이 느껴진다. 웃으면서 덮어버리고 혐오하기. 대표적인 미움의 방법 중 하나가 비웃음이듯, 웃음은 때로 강력한 혐오의 수단이 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안전한 행복이 퍼뜨린 웃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한다며, 어떤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며 미친 듯이 웃는 사람들. 그 과하고 초조한 웃음소리는 현재 이 사회에도 분명 울려 퍼지고 있는 웃음소리일 것이다.


더 다양하고 재밌는 세상을 위해

최근 점점 여러 방면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성인 내가 조금 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그중 하나다. 나는 내가 판타지나 액션 오락물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빠르고 화려한 액션과 웅장함이 주는 감동을 나는 못 느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화려한 액션을 하는 멋진 남자 주인공, 그리고 옆에 액세서리로 달려있는 예쁜 여자 캐릭터. 마술을 쓰는 멋진 남자들 그리고 곁다리 악녀 캐릭터 여자 캐릭터. 치열한 범죄 두뇌 싸움을 하는 멋진 남자들 그리고 시체로만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 (냉장고의 여자들- 여성을 남성을 각성시키기 위한 시체라는 기호로만 활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라는 말도 있다.) 이 모든 게 여성인 나에게는 불편해서 도저히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한 남성들의 자아도취로 숨 쉴 틈이 없는 현실성 떨어지는 작품들. 드라마에서는 모든 남성이 여자 친구를 위해 목숨 건다고 포장하지만 텔레비전을 켜면 여자 친구를 죽이는 남자들이 계속 보도되고 있는 현실. 극악한 성범죄자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를 묻기 위해 공조하는 남성 연대. 그 가운데 그런 현실성 없고 설득력 떨어지고 유해한 환상만을 판매하는 콘텐츠가 재미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허무맹랑한 장르물들을 보면 불편한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제 희망을 보고 있다. 아직도 여성 주연의 작품들이라도 선한 남성과의 이성애 서사가 지배적이고,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여전히 (현대 미의 기준에서) 아름답고 날씬하겠지만. 변화는 항상 연속적이기에 계속해서 기대해보려고 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런 점에서 응원하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엄청난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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