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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Nov 27. 2021

킬링이브, 선과 악의 관계

(1) 선악과와 뱀, 그리고 이브 (종교 추종 아님)

*완전히 주관적 해석, 결말까지 나오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 

*종교 믿지 않음.


킬링이브, BBC


종교적 믿음과 관계없이 성서의 모티브는 좋은 문학적 소재이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필자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킬링 이브> 속 여러 모티브는 감상할 때의 즐거움을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선 그 줄거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뱀이 최초의 여성인 이브를 유혹하여서 금기의 과일인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아담에게도 권하게 하여) 그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선악과는 금기의 과일로 지정되었을 뿐, 성서에서 선악과가 왜 금기인지에 대해서는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효능(?)을 말하고 있을 뿐 사실 왜 먹으면 안되는지 독자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일부 실패했다(?). 


그리고 구약 성서와 마찬가지로 여성혐오가 디폴트인 많은 과거의 예술가들은 이 뱀을 여성으로 해석한다. 나쁜 길로 유혹하는 건 다 여성으로 생각해서인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l'Ancien), 아담과 이브


어쨌든, 킬링이브는 이런 스토리를 모티브로 한다.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빌라넬(뱀), 그리고 이를 쫓는 이브. 그 둘의 관계는 단순히 미워하는 관계여야만 할 것 같지만,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한 단어는 유혹이다. 이브는 빌라넬을 쫓으면서, 빌라넬은 이브를 유혹하고, 이브는 이에 매혹된다. 하지만 이 유혹은 단순하지 않다.

산드라 오 (BBC 킬링이브, 이브 역)

(1) 이브는 빌라넬을 추적한다.
이브는 소위 '나쁜 놈 잡는' 첩보원이다. 그렇다면 그 나쁜 놈을 추적해야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살인마에 대한 정보를 살인마 그 자신만큼 잘 알아야한다. 범행의 동기, 방식, 그 모든 것을. 대사에도 이런 부분이 드러나는데, 이브는 항상 빌라넬을 생각한다. 그가 뭘 먹고, 뭘 하고, 무엇을 보고, 어디로 향하는지. 그러면서 빌라넬의 캐릭터 그 자체에 매혹되어간다. 이는 빌라넬의 수법에 대해 브리핑하는 장면에서도, 빌라넬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특히 눈빛) 드러난다. 선과 악을 떠나서 빌라넬이 굉장히 매혹적인 캐릭터라는 것만큼은 시청자들도 설득당해버리고 있으니.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


조디 코머, (BBC 킬링이브, 빌라넬(옥사나) 역)


(2) 빌라넬은 이브를 유혹한다.

빌라넬은 이브에게 한 순간에 매혹된다. 그 서사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빌라넬의 취향이기 때문인가본데, 이는 (아마도 빌라넬의 첫 사랑일) 안나의 대사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그 아이의 취향이세요') 사실 안나 그 자신의 특성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빌라넬은 누가봐도 선해보이는 그런 이들에게 매혹되는 듯해보인다. 안나도 모두가 친해지길 거부하는 빌라넬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좋은 교사'였으니까. (결국 빌라넬에게 성적으로 매혹되었고 비유적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지만, 빌라넬에게 넘어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브는 여러 번, 빌라넬과 성관계를 맺었는지 물어본다.) 콘스탄틴의 말대로 빌라넬의 사랑의 방식은 결국 '증오'여서, 증오로서 사랑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안나에 대한 사랑을 이를 증오의 방식으로 풀어낸, 연적에 대한 살해와 거세로 드러남.) 빌라넬의 유혹의 방식은 상대방을 악으로 끌어내는 데 있는 듯하다. 빌라넬은 계속해서 이브에게 살인을 권(?)한다. 이브가 빌라넬을 찌르는 장면은 빌라넬을 순간 약하게 만들지만 사실 빌라넬은 이를 싫어한다기보다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에 또 살인을 권한다. 어쩌면 싸이코패스인 그의 사랑의 방식은 상대방을 함께 타락시켜 살인의 세계로 인도하여 혼자만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3) 선과 악의 미묘한 관계

선과 악이라는 표현은 이분법이라는 말과 붙어다닐만큼 경계선이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그 착하기만 한 선은 악을 이길 수 있을까? 이는 중세시대 신 개념의 추종자들의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신은 전지전능한 선인데 왜 세상에 명백한 악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다. '악이란 선의 부재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신은 자신의 부재를 용납하고 있으므로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다', '사실 얼핏 악으로 보이는 것도 그 분의 뜻이다' 등등. 사실 철학적 논증에서는 소위 말하는 전지전능하고 선한 인격신의 존재는 그 것이 기독교적 신이든, 다른 종교적 의미의 신이든 설득력을 잃어간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선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남을 해하지 않는 착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선은 악을 이길 수 있는가? 선한 사람은 살인마를 칼로 찌를 용기가 있는가, 없는가? 악을 결국 무엇으로 그럼 다스려야하는가? 


"당신은 착한 사람이에요. 슬픈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거든요. 느끼는 게 더 많아서요."
- 이리나의 대사 중


결국 악에 대한 감수성 없이는 선을 이룩하기가 어렵다. 악을 모르면서 악을 타파하겠다는 투쟁은 공허하다. 결국 전쟁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벌어질지도 모른 채 싸움에서 이기겠다고 하는 꼴이다. 



이브의 캐릭터가 혼돈스럽다는 평이 많던데, 사실 굉장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로서 당연할 수밖에 없고(모두에게 공존하지만, 극단적 선과 극단적 악의 공존) 이런 캐릭터를 해석해내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면서 정리한 내용을 적어보고자 한다.


(+트웰브의 존재 등으로, 사실 빌라넬을 단순히 악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모티브에 대한 주관적 해석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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