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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픽처 Aug 14. 2020

마스크 없이 맞이한 타국의 봄

나의 사적인 해외여행 기록


19년 3월의 일본 여행에서 내가 기대했던 건 벚꽃 가득한 풍경이었다. 아쉽게도 벚꽃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렸던 새파란 하늘, 노란 꽃 그리고 초록색 들판을 배경 삼아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공기마저 달콤했던 규슈올레와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올레구나! 제주 올레도 걸어본 적 없던 내가 일본에서 규슈 올레를 걷게 될 줄이야. 약 12km 도보 결전(?)을 앞두고 설렘 반, 긴장 반으로 큰 숨을 내쉬었다. 이날의 코스는 규슈 올레 22개 코스 가운데 19번째로 개장한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 본격적인 시작점인 가미야도루 죽림에 도착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대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늘어서 있고 거기에 안개까지 더해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장엄한 풍경에 압도된 것도 잠시. 미세먼지로 지쳐있던 나의 폐가 드디어 활짝 웃으며 상쾌한 공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입 벌려~ 프레시 에어 들어간다!)



숲속의 길을 따라 걷기를 40여 분. 안개 속에 숨어있던 조야마 사적 삼림공원 전망대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출발하기 전 기대했던 지쿠고 평야의 모습은 짙은 안개로 인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풍경보다 더 달콤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가자들을 위해 준비한 팬케이크, 양갱, 푸딩 등 다양한 현지 간식이 그 주인공. 찰나의 달콤함을 맛보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없었다. 게임 속 퀘스트를 깨는 플레이어가 이런 느낌일까 재미난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만난 점심 식사. 땀 흘리고 먹는 밥은 언제 먹어도 꿀맛이지만, 이 날의 점심은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웠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일 때는 몰랐던 규슈올레의 진짜 색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밥도 먹었고 날씨도 좋으니 컨디션 최상인 상태로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거기에 카메라를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일본 시골마을의 아기자기한 감성은 찍고 걷고 찍고 걷고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마을에서 숲 속으로 들어가자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듯한 초록 이끼로 물든 신비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날 내린 비로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더해지니 상쾌함 그 자체.



하지만 이내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100개가 넘는 계단! 나는 누구인가 여긴 왜 왔는가. 운동화 끝을 조이고 계단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끼가 잔뜩 낀 돌계단을 걷고 있자니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 나타난 기요미즈데라 절 누문의 모습은 약간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1745년에 지어졌다고. 300여 년 전 건축물이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그렇게 한 번 더 가파른 계단을 오르게 되면 기요미즈데라 절을 마주하게 된다. 교토의 유명한 기요미즈데라와 이름이 같은 이 곳은 크지는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 곳에는 결혼, 임신, 순산의 신이 모셔져 있어 신혼부부를 비롯 저마다의 안녕을 기원하는 현지인들이 찾는다고 전해진다. 절 옆에는 1836년에 지어진 높이만 무려 26.5m에 달하는 기요미즈데라 절 삼중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풍기면서 기요미즈산과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장관을 뽐내고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삼중탑 앞의 커다란 벚꽃나무가 만개한 모습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다시 등장한 대나무 숲. 바람에 흔들리며 대나무들이 내는 자연의 asmr을 듣고 있으니 이 순간이 멈추길 바랐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오후 2시가 아닌, 자연 속에서 맞이한 오후 2시가 이토록 소소한 행복일 줄이야.



경쾌한 대나무들의 댄스 공연이 끝나자 코스의 클라이맥스인 지쿠고 평야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멀리 기요미즈산과 오마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연두색 보리밭을 걷고 있으니 시골마을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더라. 한국과 일본의 시골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아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초등학생 아이들이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멋쩍은 듯 씨-익 웃었는데, 웬 꼬마 녀석 한 명이 웅덩이를 발견하고 규슈올레 완주 선물(?)을 선사했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뒤로하고, 도착 지점인 미치노에키 휴게소 마트에서 현지 특산품, 농산물 구경도 하고 일행들과 서로의 완주를 축하하는 것으로 행사는 끝이 났다.  



적당히 따뜻했던 19년 3월의 어느 봄날, 적당히 시원한 바람까지 완벽했던 그날의 산책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달콤 쌉싸름했던 규슈올레와의 첫 만남 이야기는 여기까지. 2탄을 찍을 그날을 기다려본다.




#규슈올레 info


규슈올레 제 19코스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는22개의 규슈올레 중에서도 역사와 자연이 잘 어우러져 현지인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코스로 꼽힌다. 총 길이 11.5km, 난이도는 중~상급이지만 초반의 전망대를 오르내리는 3km 구간 정도만 제외한다면 어렵지 않게 완주할 수 있다. 대나무 숲을 시작으로 조야마 사적 삼림공원·전망대, 기요미즈데라 절 & 삼중탑 그리고 지쿠고 평야에 이르기까지 규슈의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색다른 일본 여행을 원한다면 규슈올레에 도전해보자.



#에필로그


불과 1년 전만 해도 미세먼지를 피해 떠났는데, 2020년에는 떠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난 여행을 추억하며 가장 그리운 것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버스를 타는 그 순간이다. 여행업에 몸담고 있는 나에게 생계와 취미 모두를 앗아간 코로나가 너무나 밉지만, 덕분에 외장하드 속 쌓아두기만 하고 살펴보지 못한 지난 여행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1년 전, 해외여행 기록을 시작으로 브런치를 통해 나의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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