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십 대 후반까지 “조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양쪽 할머니만 살아계시거나 모두 돌아가신 경우가 더 흔했다. 이 말을 달리하자면, 난 부모 혹은 부모에 가까운 자의 상실감을 느껴본 적 없는 채 어른이 됐다. 내게 부모란 당연히, 불의의 사고가 있지 않은 한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러다 2020년과 2023년에 내 부모의 두 아버지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두 분 다 병의 시작은 암이었고, 사인은 파킨슨과 폐렴이었다. 그중 오늘 얘기할 사람은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친할아버지다.
지금부터는 친할아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하니, 굳이 친할아버지라고 칭하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하겠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는 내가 외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무척 서운해했던 게 생각이 난다. 친할아버지한테는 그냥 할아버지라고 하지 친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지 않냐고...외할아버지라고 불릴 때면 친할아버지 쪽이 진짜 할아버지 같고 당신은 반쪽짜리 할아버지인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든다며, 외가에 올 때는 외할아버지 아닌 할아버지, 외삼촌 아닌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맞아, 외할아버지는 그런 걸 섭섭해하는 사람이지. 친할아버지는 고모의 딸인 친척 언니가 외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서운해했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걸 섭섭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호칭 똑바로 하라며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 하셨을 분이다.
할아버지는 꼬장꼬장한 어른이었다. 가족에게도 타인에게도 세심하거나 다정한 성품은 아니었다. 다만 책임감 있고 성실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따금 그가 지나칠 정도로 부지런하다는 생각도 했다. 일례로,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3차 항암치료를 끝내고 퇴원한 2022년 10월 중순, 양파 250개 모종을 사다가 밭에다 심었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이 생계인 사람이 아니다. 다만 사람은 일을 해야 하고, 당신의 일은 곧 농사며, 양파를 심을 때가 됐으니 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날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크게 화를 내며 울먹였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많아졌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이날이 내가 아빠가 우는 걸 처음 본 날이다. 할아버지는 다음 해인 2023년 3월에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의 49재가 양파의 수확 철과 겹쳤다. 양파는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모종을 심고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사이에 수확한다. 그 해의 양파 농사는 잘됐고, 아빠는 혼자 그 많은 양파를 수확하며 혼자 울었다고 한다.
이따금 할아버지는 사람이 아닌 어떤 상징 같기도 했다. 짐승 아닌 인간만이 신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만의 신념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모습이 되려 인간적이지 않았다. 조금만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책임지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한다. 제때 대학 가고 취직하고 결혼해 자식을 낳는,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 딸은 출가외인이다. 부부는 한평생 함께 해야 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하고,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며, 젊을 적 고생하는 건 당연하지 세상이지 말세라 다들 쉬운 일만 하려 한다고 화를 냈다. 문경에 있는 모 대학교를 보고 공부 안 하고도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은 대학으로 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딸 둘 낳은 친척 새아기가 더 이상 자녀계획이 없다고 하자 “어디 남의 집에 와 대를 끊으려고 하냐?”라고 호통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분이다. 이건 무려 2020년의 일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만은 눈 감고 귀 닫고 감싸 안았다. 할머니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 살면서 보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다. 할머니를 나르시시스트라고 분류해야 할지, 소시오패스라고 분류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상식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체면치레를 중요시하고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인데, IMF가 터지기 직전 ‘줌마관광’이라는 관광사업을 벌였다가 크게 실패했다. 할머니는 남편이 있는데도 여자 이름으로 사업하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업을 벌였다 망했고, 할아버지는 그 이후 신용불량자로 평생을 살았다. 할머니의 사업에 일부 보증을 선 아빠는 한동안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고,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개봉동 한가운데에 있던 2층 다가구주택과 작은 원룸 여러 채도 한 번에 날아갔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 듣는 앞에서(그게 가족일지라도) 당신의 아내를 비난하거나 면박을 주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 공사 감독을 도맡아 하는 야무지고 믿음직한 일꾼이었다. 이후 할머니의 빚을 갚기 위해 새벽 4시 일자리센터 앞에 줄을 서 공사장 막노동을 일감으로 삼고, 할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몰래 찔러주는 소일거리를 부업으로 삼으면서도 아빠나 고모가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언질만 줘도 호통을 쳤다. 자식이 부모에게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10여 년에 걸쳐 어느 정도 빚을 청산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말과 함께 할머니와 지금의 시골집, 평산신씨 집성촌인 문경시에 정착했다. 아무리 집성촌이라고 하더라도 오래 고향을 떠나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울에서 온 외지인’이었고, 서울에서 잘 나가지 못하니까 고향 찾아온 인간들이라는 시선과 텃세에 시달리면서도 할아버지는 꿋꿋했다. 맨날 동네 할머니들과 싸우고 토라지고 드러누워 버리는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시골의 삶에 빠르게 적응했다. 매일 새벽 뒷산에서 장작용 나무를 가져오고, 농사지을 논과 밭을 마련해 씨를 뿌리고, 닭장을 만들고, 개를 얻어다 키우고, 동네 이장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는지 감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쪽 같은 양반”이라고 평했다. 아직 남편이 살아있는 할머니들은 “그 집 남편이 부럽다”는 말을 숨기지도 않고 면전에다 했고, 할머니는 아빠·엄마 앞에서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사람 피 말리게 꼬장꼬장한 사람인 줄 아냐며 흉을 봤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내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경우가 드물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머니나 젊은이(경상도에선 며느리를 젊은이라 부른다. 즉 우리 엄마다)를 통해 전했다. 아버지가 아닌 이상 남자 어른이 다 큰 여자애에게 직접적으로 훈계하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평산신씨는 딸에게는 돌림자를 쓰지 않는다. 여식은 제사상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많아 한 상에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하지 못한다면, 상을 두 개로 쪼개 남녀 따로 앉는다. 명절이 되면 남자 어른은 한복을 입고 ‘유건’이라는 전통 모자도 써 복장을 단정이 갖춰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한복에 이염은 없나 살피고 유건의 모양을 잡고, 꼭 새 양말을 꺼내 신었다. 내가 명절 당일 오전 8시가 넘었는데도 자는 걸 보면, 할머니를 시켜 ‘일어나서 젊은이 도와주라고 해라’고 말할 뿐 내게 직접적으로 일어나라고 하거나 내 몸을 흔들어 깨우는 일은 없었다.
2021년 늦여름, 하루의 농사일이 다 끝난 후 밤이 어둑해진 때였다. 시골의 8월 말 저녁은 풀벌레소리로 가득했다. 잠이 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마당에 간이식 의자를 놓고 앉아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창고에서 돌아와 나를 흘긋 본 할아버지는 내게 일이 힘들진 않냐고 물었다. 그때의 나는 사건 담당 기자였고, 주말에도 사건사고를 쫓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을 때였다. “괜찮아요. 일 하는 게 다 그렇죠”라고 나는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괜스레 마당 주변을 정리하는 척하며 뜸을 들이다 “니 아빠한테 들었다. 니 사는 거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나 보다.’라고 내 눈도 보지 않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해 겨울 배가 자꾸 아프다고 했고, 병원에 가 정밀검사를 받았을 땐 이미 대장암 말기였고, 항문 쪽에 암세포가 위치해 수술도 어려웠다. 할아버지가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건강 체질이었던 건 대장암 말기 앞에선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한참을 대장암 말기라는 걸 숨겼다. 장 쪽에 염증이 있다네요 아버지, 안동병원이 잘한다니까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치료받으시면 좋아진답니다. 아빠는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할아버지의 주치의도 이상하리만큼 아빠에게 협조를 잘해줬고, 할아버지에게 시술과 약물만으로 괜찮아질 병이니 식사 잘 챙기시느라, 치료 잘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그의 병을 두루뭉술하게 에둘러 표현했다. 주변의 지인과 친지들이 암 등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날 때도 ‘늙으면 가는 게 순서다.’라는 말로 그만의 애도를 표했던 할아버지에게, 차마 대장암 말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암 말기라는 걸 알게 되면 치료도 마다하고 죽을 때를 기다릴 것 같아 그랬다. 실제 할아버지는 결국 항암치료 3차 중 그의 병을 알게 됐는데, 코로나와 폐렴이 연이어 겹쳐 쇠약해진 몸을 그저 순응했다.
지역 상관없이 유사한 형태의 결혼식과 달리, 장례식은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 경상도는 망자를 상주에게 각인시키려는 듯한 절차가 많다. 일단, 곡을 많이 한다. 할아버지는 생전에도 “경상도는 시아버지 죽으면 며느리가 곡을 하는데, 우리 집 젊은이는 곡 못 할 거 같이 생겼다”는 말을 종종 했다. 나이 많은 친척 어르신들은 땅을 치며 쩌렁쩌렁 곡소리를 하고, 염할 때는 나지막하게 한자어로 된 주문 같은 것을 외며 흑흑 대기도 했다. 항암치료가 4차까지 이어졌던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은 거의 빠진 상태였고, 피부는 반건조시킨 생선처럼 바짝 말라있으면서도 미묘하게 잿빛이 돌았다. 망자 앞에서 엎드리듯 앞으로 숙인 산 사람들 사이에서 풍기는 소독약 냄새와, 밀폐된 공간에서 웅웅 거리며 울리는 주문에 누군가는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화장할 때는 뼈가 재가 되기 직전까지만 태운 뒤, 망치를 들고 상주들이 뼈를 곱게 빻는다. 부모의 시체를 자식이 빻아, 뼛가루를 모아 나무상자에 담으며 운다. 시골 선산 나지막한 곳에 화장한 시신을 묻고, 묘를 만든 뒤 땅을 밟는데, 산짐승이 건드리지 않도록 거의 뛰면서 밟아야 하고, 그 와중에 곡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모와 삼촌들은 외할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면 ‘두 할아버지들이 하늘에서 만나 술 한잔하고 계실 거야’라는 감성적인 말을 이따금 내뱉는다. 타고난 한량인 외할아버지와 성실하고 꼬장꼬장한 친할아버지는 겉보기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지만 의외로 자주 왕래했다. 열 마디 말을 하면 여덟 마디가 허풍인 외할아버지와 그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아 하는 친할아버지는 의외로 합이 잘 맞았는데, 이따금 만나 술과 개고기를 나눠먹었고, 만나기 며칠 전부터 묘하게 즐거운 내색을 보였다. 두 분이 실제 서로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는 모르지만 다 산 사람들 마음 편하려고 생각한다고 하면, 낯선 곳에 낯익은 얼굴이 있는 건 좋은 거니까. 그 말을 듣고 있으면 할아버지 생각이 이따금 나는데, 굳이 따지자면 외할아버지와 더 친밀하게 지냈는데도 요즘 이따금 할아버지 생각이 나는 건, 성인이 된 후의 나는 내 생각보다 아빠와 더 닮았고, 아빠는 기억보다 할아버지와 더 닮았구나 싶어서 그렇다. 글 말미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에서 나오는 할아버지의 생각은 모두 내 추정일 뿐이다. 할아버지가 아빠라면, 아빠가 나라면 그럴 것 같다는 추정에 불과하다. 추정만으로 할아버지의 캐릭터가 실제와 비슷해지는 걸 보면, 우리 셋은 정말 많이 닮은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