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간략한 나의 서양 회화사2

실용적이지만 비실용적인

by 늘심심

제 2편

중세에서 신고전주의까지


중세가 진행과정 중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론이 중세의 유일신 중심의 신학으로 대체되면서 표현 대상은 제한되었고, 성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잔틴 양식적 변형은 지상 세계의 일회성과 신이라는 원본에서 한참 부족한 복제를 드러내는 장치라는 이중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 원리를 설파하여 중세 신학의 기본 지침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에 비교되고, 원본과 복제의 개념에서 대비를 이루는 현대철학을 잠시 소개하는 곳으로 점프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보이는 다양한 미술 양식의 철학적 근거를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um)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은 원본 없는 복제물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과정이며, 그 결과물인 시뮬라크르는 과거 이콘(성상)이 신의 부재를 감추는 역할을 했던 것을 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실재(원본)를 대체해 버립니다. 즉, 신(절대적 원본)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시뮬라크르 자체가 실제이며, 원본을 잃어버린 이미지 자체도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철학적 근거를 예술 작품에 부여해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떠올려 보자면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마릴린 먼로」가 대표적이겠지요. 이에 대해선 후에 더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중세 말이 되면 벽화에 그쳤던 성상화는 건물 벽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목판 위에 그린 제단화로 변용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아마 우리가 절집에서 보게 되는 후불탱화의 역할을 하게 되고 저는 이를 근대적 회화로 향하는 점진적 사건의 연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잠시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채색 십자가(Croce Dipinta): 마에스트로 굴리엘모의 <사르자나 십자가(Sarzana Crucifix)> (1138년)

• 도살레(Dossale, 제단 장식판):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리의 <성 프란치스코 제단화> (1235년)

• 마에스타(Maestà) 양식의 대형화: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마에스타> (1308~1311년)


위의 작품 예시는 연도를 중심으로 했는데, 시작은 일부의 성물에서 시작했으나 점차 성당의 중심이 되는 표상 체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치며 특히 시에나 대성당의 주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두초의 마에스타에 이르러서는 건물 벽면(프레스코)에서 제단 위(패널화)로 회화의 형식과 배치가 서서히 변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두초의 패널화 시기가 14세기 초인 것을 감안하면, 1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강력한 징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르네상스와 결합되어 비잔틴 양식적 왜곡에서 벗어나 다시 인간 시각 중심의 세계 모사라는 그리스 로마의 양식을 재탄생시키고 우리가 자주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대가들의 작품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상공업의 성행과 더불어 신흥 자본가 계층, 부르주아지의 형성 시기이기도 해서 부를 기반으로 한 인물들의 자기과시적 정체성을 화폭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래서 회화적 표현은 교회 벽에 회반죽이 기본이 된 수성 프레스코화나 목판 위의 템페라화에서 확대되어, 린넨 천 위에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형제가 완성했다고 알려진 오일 베이스의 물감을 사용하는 유화라는 장르가 탄생하게 됩니다. 프레스코화나 템페라화는 기본적으로 수성 용제를 사용하기 때문에 습기에 약한 단점이 있었지만 이 유화의 개발로 인해 세월에 견디는 내성이 강하고 더디게 마르는 특성으로 인해 캔바스 안에서의 혼색도 가능하게 하여 보다 풍부한 깊이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중심으로 표현되던 인물들은 세속적 인물들까지 확장되었고 중세 시기에 길드에 속하면서 대형 프로젝트에 집단적으로 작업했던 화가들이 자유직업인으로서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교회나 귀족 중심의 대형 주문이 줄게 되자 여가 시간에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리게 되었고, 이 그림들은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형성되어 있던 오픈 마켓에 흘러나와 신흥 자본가 계급의 집을 장식하는 데도 쓰이면서, 그 소재도 풍경, 정물 등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대가들의 작품이 여전히 교회의 주문 제작에 기대었던 점과 동시에 르네상스형 인간의 대표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전장을 헤매며 시체를 해부하고 인체의 세부적 특성들을 연구하고, 과학적 인식과 상상력이 결합된 많은 개인적 자료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양면성, 문턱이라고 표현할까요, 그런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화가는 당연히 자신들에게 주문한 그림에 대한 대가를 화폐로 받게 되었고 르네상스 시기보다 좀 더 뒤인 17세기 이야기지만,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는 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당대의 부르주아지처럼 돈주머니를 차고 그린 자화상도 있습니다. 나중에 파산 선고를 받기도 했지만요.

18세기 유럽은 프랑스를 기점으로 혁명의 바람이 불게 됩니다. 프랑스의 절대 왕정하의 봉건적 통치의 폐해는 민중 봉기의 원인이 되어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왕정이 붕괴되고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과 후속 조치들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당시의 화풍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 중 하나는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입니다.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화풍의 이 그림은 당시 자코뱅당을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인 마라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이미 주제는 성경 서사와 인물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현실 중심 묘사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그림에서 마라의 욕조 밖으로 늘어진 팔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묘사된 예수의 팔과 유사하고 마라의 포즈 자체가 카라바조의 ’죽은 그리스도의 자세‘를 차용하고 있는 점은 대의를 위한 희생이란 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성경적 함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물의 자세나 장식, 배경, 사물에 각각의 은유를 담아 거의 암호 해독문에 가까운 그림을 완성하는 도상학적 전통은, 이미 앞선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를 거치며 매우 정교하게 발달해 온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바로크 시대의 해골과 모래시계는 인생의 덧없음을, 로코코 시대의 큐피트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신고전주의 시대의 로마식 기둥과 수없이 많이 보이는 직선은 도덕적 강직함과 사회적 질서라는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각적 암호화는 비슷한 시기에 기틀이 잡힌 고전 발레에서 손과 발, 신체의 표현에 엄격한 규칙과 은유를 담아낸 흐름과도 정확히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이런 은유를 그림 속에 삽입하고 그 의미를 공유할 줄 알았다는 사실은 루이 14세 시기에 시작된 도량형의 표준화와도 그 궤를 같이하고 절대 왕정 통치를 뒷받침하는 표준화의 한 증명이 됩니다. ’미‘라는 추상적 개념도 신에게서 지상으로 내려진 고유한 개념이며 제왕은 그 권리를 이어받아 규칙을 정립할 수 있다는 논리 하에서 시작된 표준화이자 동시에 미는 비례성과 규칙성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고전 미학의 개념인 것을 생각해 볼 때 신고전주의와 동시대에 형성되고 정착된 발레 동작이 표준화된 은유의 규칙을 가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발레의 은유의 예도 잠시 들어 볼까요? 너무 많아서 손동작을 위주로 해서 몇 가지만 열거해 보겠습니다.


주로 오른손을 가슴에 대는 것은 사랑과 진실을, 주먹을 쥐고 아래로 X자로 교차하는 것은 죽음과 끝마침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스치는 것은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때만 되면 찾아오는 러시아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가시기 전에 이러한 마임의 여러 동작들의 의미를 미리 알고 가시면 아마 감상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회화에 있어서 이런 재현의 규칙성이 파멸을 맞이한 것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불리는 은판 사진술의 등장이었습니다(1839). 화가들이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정확한 재현을 위해 지켜야 했던 모든 규칙성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신고전주의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가 "오늘로써 회화는 죽었다"고 절규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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