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간략한 나의 서양 회화사 I

실용적이지만 비실용적인

by 늘심심

<일단>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일종의 저의 뇌지도를 제공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작품을 감상할 때 제 인생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일종의 기준점들로 이어진 이 지도를 가지고 작품이 대충 이 지도 위의 어느 지점에 있겠다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기준 텍스트 없이 제 머릿속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쓴 것이라 참고해야 할 특정 미술품이나 텍스트가 나와야 하는 순간에만 검색과 AI의 도움을 빌어 돌파했으며, 서술하는 방식은 역사를 따라가는 편년체로 쓰여 있지만 사실 제 뇌 속에는 비편년적 점들의 연결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해상도 낮은 백만 대 일 축척의 지도와 비슷하여서, 찾고자 하는 곳의 정확한 위치보다 위치를 중심으로 한 관계의 망으로 읽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관계 중심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사용되는 비유나 묘사는 전부 저의 자의적인 해석이어서 전혀 학문적 영역이 아님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실용적이지만 비실용적인 분량이라 브런치스토리에 맞게 네 편으로 나누어서 게재합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다양한 미술 양식은 도대체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는가를 추적해 보는 것은, 비단 미술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와의 긴밀한 연관성과 같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너무 방만해질 우려가 있으니 서양 회화로 그 폭을 좁혀 걸어가 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제 1편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현실 세계를 이미지로 모사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모두들 아시다시피 세계 도처의 동굴벽화와 거석문화에 잘 남겨져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프랑스의 쇼베동굴 발견자 3인이 집필한 『Dawn of Art: The Chauvet Cave』(1996) (한국어판 제목: 『동굴 벽화의 새벽』)에 실린 증언에 따르면 "These are not stereotyped images which were transcribed to convey the concept 'lion' or 'rhinoceros', but living animals faithfully reproduced." (이것들은 '사자'나 '코뿔소'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옮겨진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아니라, 충실하게 재현된 살아있는 동물들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동굴벽화는 약 37,000여 년 전인 후기 구석기 시대에 최초에 그려졌고 그 후 시기를 달리하여 약 21,000여 년 전까지 비정기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최근의 조사 결과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최근 BBC에서 제작한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의 중간 즈음을 보시면 검은색 목탄으로 동물들을 데생하듯이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재현적 행위가 단지 대상이 되는 자연을 모양과 색상 그대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원시 화가의 재료 선택에 의해 '표현'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단색 목탄으로 윤곽을 그리고 문지르고 하면서 표현된 이미지는 동굴에 비치는 깜빡이는 불빛과 결합되어 오늘날 우리가 영화적 착시라고 부를 만한 생동감 있는 동작을 표현한 것을 많은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가시간에 컴컴한 동굴 안에서 불을 밝히고 석기시대 예술가들의 예술적 표현을 위해 부족이 다 동참하였을 것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죠. 그래서 많은 이론가들은 주술적 원리와 결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로 풍요와 관련해서이고 일부는 사냥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위한 제의적 행위라고도 쓰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런 주술적 원리는 문명이 현저한 발전을 이루는 때에 이르러서는 신앙 체계와 결합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자연을 관찰하여 그것을 모사하는 능력은 일찍부터 인류가 가지고 있던 놀라운 능력 중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현대에선 인간이 기계에 위임해 버린 정밀한 자연 관찰과 그것의 재현 능력은 이후에 벌어지는 정교한 회화적 능력의 밑바탕이 되는 셈이죠.


동굴이 항온 항습의 조건과 몇 만년 가량의 폐쇄 조건 때문에 그 이미지가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문명이 발생된 시점의 회화가 남아 있는 것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주로 부조나 조각의 형태로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이 시대의 그림 양식이 어땠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비교적 어려운 편입니다. 그렇다고 조각이나 부조에서 표현된 양식을 보고 그대로 평면에서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큰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예를 봐도 조상은 멀쩡히 그 입체감과 사실성이 잘 표현되어 있지만 부조에서는 비례와 원근법을 무시한 개념적, 텍스트적 해석으로 치환된 양식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이집트에선 몸동작이나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어도 언제나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이른바 '정면성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비교적 강고한 물성에 힘입어 남은 파편들에서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과 인식의 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우선 서양 문명의 원류라고 생각되는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과 도기로 된 모자이크, 그리고 건축물이 남아 있는 상태로 볼 때, 이 시기에도 분명히 미적 대상으로서의 양식이 각기 자리 잡고 있었지만 동일한 하나의 신화 체계 안에서 작동되었기 때문에 그 목적은 신에게 봉헌되는 여러 가지 상태로 환원시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AD 313, 밀라노 칙령) 로마에서는 특정 황제의 치적을 위한 조각상이나 폼페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귀족의 세속적 욕망 실현을 위해 사용되었던 상황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미술품이 갖는 이러한 역할과 위상은 다신교적 신화 체계가 유일신 체계로 전환된 중세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교회라는 건축물 안에 성상화인 이콘(Icon)과 성인들의 조각상이 함께 배치되고, 신을 섬기기 위한 성물들로 분명한 역할이 있었으니까요. 잠깐 옆길로 새자면,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듯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표현 속에 등장하는 이 아이콘의 원형이 바로 교회의 벽화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화죠. 교회의 대표 성물이 현대에 와서는 어떤 이미지의 대표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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