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키치 - 데미안 허스트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물리적 불가능성>
<Spot Painting>
한 작가에게서 두 계열의 작품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잭슨 폴록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뿌리는 방식의 '드립 페인팅'을 구사해서 명성을 얻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심리학적 드로잉'이 그가 심취한 또 하나의 작업 계열입니다. 당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주자라는 광풍과 그 역사적 위치 때문에 종종 가려지곤 합니다만, 동일한 시기에 이런 심리학적인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는 것은 현대라는 모종의 파편화된 심리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폴록이 죽음 직전까지 매진했던 이 드로잉들은 당대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철저히 해부당했지만, 정작 폴록 자신은 이 흑백의 이미지 그림들을 더 선호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작업에서 이 심리학적인 드로잉을 먼저 그렸다가 그 위에 드립으로 덮어서 감추는 방식을 쓰곤 했습니다. '잘 팔리는 것'과 '그리고 싶은 것'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고, 그를 주정뱅이로 이르게 했다는 게 너무 예술가 친화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이런 갈등 때문에 그가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자살을 했다는 설까지 대두되어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될지에 대해 강한 확신이 없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곤 합니다. 특히 평면과 입체는 차원의 분리뿐 아니라 담아내는 예술적 개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그 연속성을 쉽사리 잃어버립니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이 차원을 넘나들며 작업하다가 한쪽을 포기하는 사례가 왕왕 발견되는데, 자신이 표현해내는 작업이 어느 한쪽의 차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시인인 동시에 소설가인 경우가 드문 이유와 비슷할 것입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사체를 포름알데히드에 넣는 입체 작업과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뒤덮인 평면 작업을 따로 전시해 놓고, 이게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 처음 보는 이에게 설명한다면 즉각 인지적 불일치를 경험할 것입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한 인터뷰(Interview: Damien Hirst | Gnyp Art Advisor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MG (마르타 닙): 당신 작업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핵심 아이디어들은 단 4년 사이에 형성되었습니다. 1988년에서 1992년 사이, 당신은 스폿 페인팅, 스핀 페인팅, 자연사 시리즈, 약 상자(Medicine Cabinets)를 만들었죠. 당시 본인의 이 거대한 창의적 폭발을 자각하고 있었나요?
DH (데미안 허스트): 네, 하지만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세대가 그랬죠. 우리의 가장 큰 공통점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고, 저는 그게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골드스미스에 가기 전, 저는 제 안에 수많은 상충하는 아이디어들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골드스미스에서 깨달았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요. 그냥 그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아이디어들이 상충해 보일지라도, 내가 가진 모든 아이디어로부터 작품을 만들기로 한 것이죠.
골드스미스는 그가 다닌 대학의 이름입니다. 서로 달라 보여도 '다 때려 넣기로' 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잭슨 폴록이 죽음에 이르도록 고민했을 법한 그 지점을 허스트는 너무나 쉽게 봉합해 버린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로버트 휴즈가 '가디언'지 등을 통해 발표한 비평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어: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해양 생물"이자 "조잡한 상품(tacky commodity)"이며 "영리한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다.
불일치: 스폿 페인팅을 "브리짓 라일리의 아류인 멍청한 작업"이라 일축하며, 허스트 작업의 불일치는 그것들이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채 텅 비어 있음을 증명한다.
부패와 상업주의: 상어가 썩어 교체되어야 했던 아이러니는 미술계 탐욕의 "음울한 전리품"에 대한 증상이다. 그 가격은 "터무니없고 외설적"이다.
로버트 휴즈의 비판은 타당해 보입니다. 특히 인터뷰 내용과 비평 2번을 연결해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불일치'에 초점을 맞춘다면, 왜 제가 데미안 허스트를 I편에서 제시한 '청담동의 키치'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는 유명세를 이용해 예술을 가장한 키치를 판매하는 장사꾼에 가깝습니다. 이 유명세의 배후에는 yBa 작가들을 발굴한 광고 재벌 찰스 사치가 있지만, 허스트는 그 자본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휩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브랜드'가 되어 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공모했습니다. 참고로 운전도 못하는 데미안 허스트는 자동차를 15대 소유한 부호에 속합니다.
마르타 닙과의 인터뷰 전문을 보면, 허스트는 대학 시절 안소니 도페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칼 안드레의 미니멀리즘 조각들을 직접 만지고 설치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의 엄격성과 물성의 본질을 최전선에서 경험했던 사람이 어떻게 그 형식을 껍데기만 남겨 이런 사기적 작업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또한 작품에 붙는 장황한 명제는 관객의 자유조차 자신의 강권으로 제한한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이에 대해 로버트 휴즈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이 가련하고 슬프고 주름진 전직 상어는, 미술관 관람객들에게 채워주기로 되어 있는 그 놀라움의 감정을 내게는 전혀 채워주지 못한다. 이것은 그저 원초적인 액체 속으로 사라져가는, 먹지도 못할 불활성(不活性)의 물고기 조각일 뿐이다. . . 이것은 하나의 코미디다. 하지만 일종의 치졸한 코미디다. . ." (로버트 휴즈의 다큐멘터리 '모나리자의 저주' 중에서)
로버트 휴즈의 눈을 통해 본 데미안 허스트가 여러분이 본 모습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놀드 하우저의 키치적 속성을 감춘 채 군림하는 '진정한 상업적 키치'라는 점을 눈여겨보신다면, 이 시대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쁜 미술의 정체를 간파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