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카프카, 요셉 보이스, 장자

by 늘심심

변신, I Like America, America Likes Me, 곤화위붕(鯤化爲鵬)


어떤 이야기들은 전후 사정이나 맥락 없이 불쑥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독자를 당혹하게 하고, 이 다음은 어떻게 전개되려고 그러나 하고 의아심을 가지고 계속 듣게 됩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처음도 그와 같으며, 중간도 그와 같고, 끝도 그와 같아서 의아심보다는 불통의 불쾌감이 더 들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케네디 공항에서 르네 블록 갤러리로 출발하기 전, 그의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고치 상태로 들어간 후 앰뷸런스를 타고 갤러리에 도착해 다시 고치를 벗고, 철창으로 분리되어 있던 코요테와 상면하여 같이 철창 안에서 사흘을 보낸 후 올 때의 과정과 같은 방법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곤충이 되어 있었고, 이러저러한 경과 속에서 여러 가지 심리적인 변화를 겪으며 죽게 되고 가족들은 안도하게 됩니다.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곤은 때가 되면 붕으로 변해 남쪽으로 간다고 합니다. 이 세 이야기는 그야말로 설명도 없고 앞뒤 맥락도 없이 단절과 변형의 상태만 이야기해 주고 끝이 납니다. 어떤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위무로, 어떤 이야기는 공포로, 어떤 이야기는 우화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들이 갖는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고 해도 현재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보이스가 사흘 내내 코요테와 먹고 자고를 같이 하면서 점차 거리를 좁혀 마지막에는 그의 말대로 데면데면하게 되는 경과를,

그레고르가 겪는 심리적·육체적 변화의 과정을,

곤이 붕으로 변해 남쪽으로 가는 것에만 집중해서 그 장면들을 가만히 상상해 봅니다.


무엇이 인간을 변화하게 하고 그 변화에 순응하게 되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는 인류세가 끝나고 다른 종류의 존재가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변화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봤자 변화 그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곤충이 유충이나 고치 시절을 보내고 얼마 안 되는 성충의 기간을 DNA 복제라는 목표를 위해 바친다, 즉 전 생애가 DNA 복제를 위해 헌신된다는 생물학적 검토는 논리적으로는 닫혀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생이 자기 복제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얼마나 기계적이며 하나하나의 힘겨운 과정들이 허무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질 들뢰즈는 이러한 나의 허무주의에 하나의 가설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한 변화는 욕망의 흐름에 따라 흐르는 접속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욕망? 욕망이 정말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그렇게 의문을 품고 전에 읽은 듯한 다른 기억도 뒤져 봤습니다. 어라, 분명히 이것에 관해서 본 기억이 있는데 좀체 정확한 문서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물어봤습니다, AI에게. 「아가냐 숫따(Aggañña Sutta / 起世因本經)」라는 불경이며 간단한 내용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욕망이란 말은 나오지 않지만, 어떤 음식을 탐하여 취하게 된 것이 인류의 시작이었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가만 생각해 보니 저 세 개의 이야기처럼 앞뒤 다 잘라 먹어도 그 앞에 욕망을 넣으면 말이 되긴 합니다. 그런데 욕망은 시작일 수는 있어도 끝일 수는 없지요. 욕망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끊임없이 굴절하고 변화하며 다른 욕망과 접속하거든요. 나는 작가의 연대기 속 하나의 작품이나 한 권의 한 장만을 가지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작가의 위치에서 보면 다른 작품이나 장들로 이어지며 욕망의 굴절과 접속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평행선을 달리는 이 세 이야기를 나라는 존재로 끌어와서 교차시켜 하나의 집점에 두고 렌즈로 확대해 보고 있는 셈이 되겠지요.


세 이야기들은 출발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는 미국이 막강한 세계의 양극 체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을 무렵이고, 하나는 제국 말기의 음울한 유럽이고, 하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시대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야기의 배경 정도는 추리할 수 있겠지만, 어떤 이야기도 그런 배경 하에서 이 이야기를 쓴다는 조금의 힌트조차 없습니다. 화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증언은 보이스에게 있는데, 그나마도 세세한 설명은 어디를 찾아봐도 몇 마디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가지는 세 이야기들의 이상한 닮음의 감각을 추적하는 데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세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처럼 순환하지 않고, 서로를 도약하면서 공간과 여백을 남기고 나의 정체 모를 닮음의 감각을 스치고 지나가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이야기들을 어설프게 읽은 전형적 증거일까, 아니면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자세로 읽고 회상했지만 ‘닮았다’라는 감각은 진짜일까요. 문장이나 행위 자체에서는 전혀 닮았다는 낌새조차 없는데 말입니다. 하나는 읽기 싫을 정도로 음침하고, 하나는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하나는 가슴이 탁 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닮음의 묘한 감각은 도대체 어디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일까요.


생각으로 추적해 봤자 답이 없을 거란 결론이 금방 나옵니다. 이건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곳에서 나오는 감각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하고,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걸 인식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술이란 것이 언어의 층위에 있는 것들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노자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그래서 시도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나는 다시 그 이상한 닮음의 감각에만 집중하기로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말 말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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