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하여
음식도 때로는 패스트푸드와 정크푸드가 미친 듯이 그립고, 때로는 파인 다이닝의 격조 높은 메뉴와 서비스를 경험하고 싶듯이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욕구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이죠.
예술의 메뉴판은 과거에 귀족이나 왕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시민 주권 사회의 도래로 권력이 이동했습니다. 당시의 왕과 귀족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다양한 메뉴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특권이자 역사적 부침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 본성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는 고스란히 예술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고전적 미학의 가치들이 수직 낙하하면서 예술가들은 예술 대상뿐 아니라 시각과 청각, 신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와 제도에 대한 의문을 작품으로 소화했고, 이러한 변화의 결과들은 우리에게 근대 이전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예술의 여러 단층들을 한꺼번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술의 메뉴판은 과거의 귀족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두꺼워졌고, 현대의 시민들은 이를 골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본주의’라는 음식점 주인의 책략이 들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키치(kitsch)’라는 이름으로 짝퉁 취급받던 예술들조차 이제는 사회를 비틀고 꼬집는 메뉴로 포함시킬 만큼 주인장의 장사 수법은 노련해졌습니다.
음식을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과 어떤 영화를 보러 갈까 하고 고민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심리학적 용어의 분별이 우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 분석심리학은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분명히 구별하는데 욕구는 생리적인 것에 가깝고 욕망은 심리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허기를 해결하려는 것과 뭘 먹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은 욕구와 욕망이 결합된 형태인데, 배고픔을 어떤 형태로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즉 욕구라는 목적과 욕망이라는 수단이 결합되어 있는데, 여기선 욕망이 거세되어도 목적만 성취하면 되기 때문에 그 특성이 너무도 확연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영화를 보면 좋을까 라는 물음은 ‘영화 보기라는 목표’의 욕망과 ‘어떤 영화라는 수단’의 욕망이 이중 결합되어 있습니다. 욕구의 기본적 목표는 육체적 생존에 결부되어 있지만, 욕망의 이중 결합은 심리적 존재의 지속 가능성과 자아 정체성에 그 무게가 있습니다. 욕구와 욕망이 완전히 서로를 흡수하여 나오는 성적 마조히즘 같은 것도 있겠지만 주제가 산으로 갈 위험성이 있어서 방향을 예술로 전환하면, 예술의 창작과 감상 욕망은 다른 편에서 깊게 다루겠지만 정체성의 욕망과 변형의 욕망, 심리적 생존의 욕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변형의 욕망을 가장 꼽고 싶습니다만, 이러한 욕망의 종류를 나열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기에 참고로만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현대적 제도 안에서의 예술이라는 분야는 심리적 자기 존재의 지속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술이 사회의 한 활동 분야로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은 인문주의 시대를 거치며 산업혁명 이후의 분업화와 자본주의화의 속도와 궤를 같이하여 현재의 예술 제도로 정착된 것뿐이지, 그 이전 수렵 농경 사회에 있어서도 생활 속에서 그 기능은 언제나 존속되어 왔습니다.
Art라는 단어의 원형인 그리스어 테크네(technē)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기술의 뜻이었다는 것을 보면 뚜렷해집니다. 도공이 그릇에 묘사한 그림기술도 technē였고 수사학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변론 기술도 technē였음을 감안해 보면, 그 행위가 광범위하게 생활에 녹아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이스 인들이 선사시대 때 살았다면 동굴 그림이나 바위 그림도 테크네 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 전래의 밥상보 기술을 현대에 ‘패치 아트’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듯, 삶의 곳곳에 예술이 원래 간직한 의미의 원형이 녹아 들어 있죠. 이것으로 볼 때 예술 전반에 걸친 모든 행위는 비단 현대 자본주의적 예술 제도하에서의 예술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용을 거치며 삶 전체의 심리적 지속성과 균형을 위해 곳곳에 배치된 광범위한 행위라고 저는 결론을 내려 봅니다.
이렇게 예술의 원형에 대한 심리적, 역사적 추적을 해 본 것은 예술의 상업적 가치와, 자본주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쉽게 호도될 수 있는 예술 욕망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상업적 기만과 포장 아래 흔들리는 가벼운 영혼에 덧씌울 적당한 욕망의 대상으로 예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고 오래되었으며 개인과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해온,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말을 빌리자면 ‘오래된 미래’로 예술을 인식하는 것이 자신의 직관을 오염시키지 않고 예술을 바르게 읽는 독도법이 아닌가 합니다.
전래된 전통과 교육, 그리고 환경을 통해 이미 이 시대의 예술읽기에 적합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판단과 기호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훈련의 미진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리만 가설을 이해하는데 드는 시간의 반의 반 만이라도 예술에 투자 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보다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