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경우
요셉 보이스에 이어 백남준을 이야기 하는 것에 조금 부담감을 느끼며 글을 시작해 봅니다.
백남준은 아마 전 국민이 가장 많이 아는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다다익선>은 88 올림픽 해의 10월 3일 개천절을 기념하며 1,003개의 브라운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죠. 그 외에도 ‘TV 부처’ 등 많은 작품과 유명한 퍼포먼스 등으로 한국과 세계 예술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도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었으며, 말년에 당뇨로 인한 병약한 몸 때문에 여름에도 바지를 두 개씩 입고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역사를 좀 파고 들어가 보자면, 그의 조부와 부친은 섬유 사업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큰 부를 쌓았으며 부친인 백낙승은 전투기 헌납 등의 친일 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반민특위 해체 이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그 섬유 산업을 계속 지속했던 전형적인 당시의 권력 친화형 부호였습니다.
이런 든든한(?) 집안 배경으로 일찍이 고국을 떠날 수 있었고 일본, 독일, 미국을 전전하며 예술적 경력을 이어가던 그였기에, <굿모닝 조지 오웰> 이전의 작품에서는 이렇다 할 한국적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고국에서 보냈고 그 이후에 오랜 세월이 지나 고국이 그래도 세계에 이름이 조금씩 알려질 무렵에 국내에 돌아와서, 한국적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스가 개인과 전통의 서사를 신화화한 반면에 백남준은 철저한 코스모폴리탄적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말이지요.
“꼭 한국적 뿌리가 작품에 나타나야 하나?”라고 물으신다면 “전혀 아닙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만, 문제는 우리나라가 그래도 가난의 때를 좀 벗고 88 올림픽을 개최할 무렵에 고국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주류 평단과 국가 기관은 이러한 사실들을 뒤로한 채, 그의 전위적인 예술 서사에만 치중합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백남준이 보여준 한국적 행보와 귀환은 88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신흥 국력의 과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서구 예술 시장이 요구하는 이국적 취향과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적 허영심이 결합하여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였고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압축 성장기에 이르는 한국 정치경제사의 명암과 그 궤를 정확히 같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보이스처럼 나치의 파일럿이 되어 폭격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직접적 행동도, 또는 일제를 미화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기질이나 태도 아래에는 친일 행각으로 부를 쌓아 올린 그의 집안의 덕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여타 당시의 국내 문인과 예술가들이 직접적인 친일 행각으로 비난받았지만,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수립 이후 그 친일 행각자들이 주류가 되어 예술계를 이끌어 나갔다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검증의 단두대에 그를 세우지 않은 채 면죄부를 준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였으리라는 추정도 해 봅니다.
작품 자체에서 나는 그에게 감점을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천진함은 작은 소품에조차 묻어 있고, 심오한 주제를 큰 수사 없이 담백하게 풀어내는 재주에는 혀를 찰 만합니다. 초기에 음악을 전공한 그답게, 바이올린을 질질 끌거나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등의 기행도 그에게 잘 어울립니다. 젊음을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문으로 전공으로부터 떠나 세계적 담론 아래 형성되어 가는 사조들과 그 흐름을 같이하며 그 역사를 같이한 예술가는 우리나라에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화가 이중섭과 백남준이 전혀 다른 시대를 산 것 같지만, 이중섭은 1916년생이고 백남준은 1932년생입니다. 두 사람 다 한일 합방 이후에 태어났지만 이중섭은 친일의 역사는 없는, 당시로서는 평안도 대토지 소유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나, 남북이 분단되고 북한의 토지 몰수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한 현실 속에서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고, 백남준은 19세에 유복하게 전쟁을 피해 고국을 떠나 홍콩으로 향하였고, 1951년에는 다시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중섭은 6·25 전쟁 당시 피란 생활을 하며 그림 그릴 재료조차 살 돈이 없어 버려진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 했고,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 탓에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갈 뱃삯조차 구하지 못해 깊은 절망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친일 자본이라는 든든한 물적 토대가 없었던 대개의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궁핍과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백남준의 예술적 성취 이면에는 그 명과 암이 뚜렷이 존재하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전위 예술가, 한국을 빛낸 예술가 정도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비평은 언제나 모든 자료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그 평가를 자신의 잣대보다 최종적 판단은 대중들에게 맡기는 게 합리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라와 상황은 달라도 여전히 이전 회차에서 밝힌 보이스 평가처럼 예술적 성취의 이면에 있는 개인적 역사가 낱낱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사실들로 지금에 와서 백남준을 비판할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보이스 회고전에서 인간 보이스를 머릿속에 그려낼 수 없었듯, 백남준의 전시회에서 느꼈던 천진하고 명민한 코스모폴리탄적 성취가 결국 집안의 부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말년에야 고국을 찾은 그의 행보에서 느낀 환멸이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자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