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 하던 짓을 가끔 한다.
요즘 안 하던 짓을 가끔 한다. 오늘은 천천역에서 내리려다, 타려는 버스가 조금 늦게 온다고 표기되길래 한 정거장 더 가서 온물역에서 내렸다. 평소 같으면 그이가 전철역까지 나와 나를 에스코트하지만, 최근 야근이 잦아 함께하지 못했다. 오늘도 늦을 뻔했는데, 일정이 딜레이 되는 바람에 저녁 시간이 붕 떴다.
온물역에 내려 ‘마의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 타는 길을 선택했고, 이왕 노선을 변경한 김에 버스 종점에 있는 가마치 통닭에서 ‘옛날 치킨’이나 한 마리 튀길까 하며 가고 있었는데,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윤샘한테 전화가 왔다. 그 순간 내가 다른 치킨집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가려던 통닭집엔 안 가고 무심코 그 집으로 들어섰다.
통화를 하다 보니 목적지가 충동적으로 바뀌었고, 느닷없이 계획에도 없던 ‘파닭 한 마리’를 포장해 달라고 주문했다. 최근엔 거의 저녁을 먹고 퇴근하다가, 간만에 빈 속으로 퇴근해서 출출했나 보다.
게다가 갑자기 붕 뜬 저녁시간이라 이벤트라도 즐기고 싶었는지...
사실 그이는 식이요법 중이라 치킨을 거의 먹지 않고, 작은 애는 매일 퇴근이 늦는데 뭔 생각으로 치킨을 주문했는지 나 스스로도 생뚱맞다.
그러나 어차피 주문은 했고, 나는 계속 윤샘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윤샘은 내가 학교 근무하던 시절, 맘 편히 수다 떨고, 퇴근 후 운동하고, 가끔은 동네 봉구비어나 후미진 생맥주 집에서 한 잔 하던 술친구다.
내가 학교를 떠나 멀리 성수동에 자리를 잡은 이후, 윤샘은 술 동무가 없어 술을 끊다시피 했고, 나도 생각보다 격무에 지치고, 만성 염증에 건강이 안 따라줘 알코올을 점점 멀리하게 됐다. 간혹 회식 자리에서 한두 잔 마시는 게 전부라, 점점 멀어지는 그대랄까.
그런 와중에 윤샘 전화가 왔고, 딱 그 순간 치킨집 앞을 지나고 있었으니, 오늘의 파닭 포장은 운명이 아니고서야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 드라마틱한 건? 치킨만 포장했으면 사건이 아니겠지만, 치킨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15분 동안 혼자 치킨집 노상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생맥주 500 한 잔까지 주문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퇴근하던 어느 아줌마가. 남들 다 쌍쌍이 앉아 있는 치킨집에서, 혼자 전화 통화하며 생맥주 한 잔을 시키다니. 내가 봐도 참 용감무쌍한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도 혼자 있기 민망해 그이를 부를까 싶어, 윤샘과 통화하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차저차해서 온물역 앞 치킨집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으니 나오겠냐”고.
술도 안 마시고 치킨도 안 먹는 그이는 대뜸, “오다 말고 어디서 중간치기를 하고 있냐, 어서 들어오기나 하라”고 단칼에 거절한다. 그럴 줄 알면서도 제안한 내가 잘못이지 싶어 전화를 끊고, 다시 윤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샘은 학교의 고단함을 토로했다. 이제 늙어서 재밌는 일도 없고, 예전 같은 의욕도 안 생긴다며. 늙어가는 서러움 내지는 동병상련을 함께 나누다 보니, 생맥주 500에 살짝 취기가 돌았다.
20분도 넘게 수다를 떨었는데도 부족했는지, 다다음 주에 만나자고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둘 다 수다와 알코올이 엄청 고팠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홀로 치킨집 노점에 앉아, 전화로 수다 떨며 혼술을 하는 오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말았다. 참 오랜만의 소소한 일탈이다.
아마 나의 일상도 녹록지 않은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 다시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앞 고등학교 삼거리에서 만나 잠시 산책이나 하고 들어가자”고.
“산책하자”는 제안엔 솔깃했던지, 거절하지 않고 쭐레쭐레 마중을 나와주었다.
한 손엔 파닭 치킨을 들고, 다른 어깨엔 큰 가방을 메고, 그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노트 앱에 음성으로 2차 수다를 했다.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예기치 않은 행동을 했고, 술기운이 오르는지 기분이 좋다, 나쁘지 않은 저녁 퇴근길이다"고 음성 메모를 남겼다.
누가 흉을 보든 말든, 살짝 취기 오른 ‘오늘의 음주 일기’를 쓰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만천하에 공표하는 밤이다.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가 보다.
내일 아침, 일어나서 삭제 버튼을 누를지도 모를 일이다.
ㅎㅎㅎ
술 대신 커피로~~^^,
그리고 며칠 후 그 때 통화한 예전 동료샘과 드디어 술을 마셔서 한 컷 올립니다.
#오늘의음주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