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특유의 표정이 있다.
코엑스에 도착하니 도서전 전시장 주변으로 ‘믿을 구석’이라는 문구와 포스터 전광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도서전의 주제가 ‘믿을 구석’이라니, 누가 작명했는지 참 마음에 든다.
그림도 볼수록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사실 이번엔 바쁜 업무로 일정이 빠듯해 도서전에 가지 못할 줄 알았다.
출장길에 겨우 시간을 내 잠시 들렀다.
“도장은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코엑스를 휘리릭 한 바퀴 돈 셈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도서전을 관람자의 시선보다는 기획자나 마케터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부스의 기획이 돋보이는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나? 요즘 트렌드는 어떤가?’에 자꾸 눈이 간다.
하지만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그걸 다 파악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저 감으로 느낄 뿐이다.
이번에도 대형 출판사 부스는 여전히 눈부셨고, 작은 출판사들도 저마다의 색깔로 알차게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창립 80주년을 맞은 <현암사>의 팔순 상차림과 만국기 휘날리는 기획에 미소가 절로 났다.
골판지로 지은 듯한 <문학과 지성사> 부스는 마치 멋진 건물 속에 들어선 기분을 자아냈다.
대형 출판사의 부스 이벤트는 인기가 많아 줄을 서야 해서, 주로 구경만 하고 지나쳤다.
<창비>의 커다란 부스에 한강 작가와 김금희 작가의 얼굴이 걸려있다. 김금희 작가의 약진이 눈에 띈다.
올해도 <문학동네>는 작가들 사진이 한 면을 장식해 반가웠다.
<문학수첩> 부스는 해리포터 커버로 비밀의 성처럼 꾸며져 있어, 요술 거울 앞에서 셀카도 찍었다.
요즘은 포토존이 관람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예쁘게 나오는 사진 한 장이 중요한 시대이니 말이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 코너에서는 어떤 책들이 선정되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고,
사물함처럼 꾸며진 주제 전시관 ‘믿을 구석’은 신기해하기만 하고, 아쉽게도 참여는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책을 읽고 즐기는 인파가 가득했다.
역시, 우리의 미래는 아직 밝다.
올해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는 단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책방지기로 있는 ‘평산책방’과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부스였다.얼마나 인파가 많던지 겨우 배우 얼굴을 담았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의 강연까지!
(지난 금요일 기준,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많은 유명인들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배우, 감독, 전 대통령까지 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니, 책은 여전히 모든 문화의 중심 플랫폼이다.
대형 출판사는 화려하게,
작은 출판사는 알차게,
독립 출판사는 소소하지만 개성 있게—
그 다채로움이 모여 책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굿즈의 경연장처럼 부스마다 다양한 아이템이 눈길을 끌었다.
그 가운데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윤 에디션’ 부스였다.
우동집 입구처럼 천이 드리워진 틈 사이로 사람들이 모여 있어, 나도 자연스레 발길을 들였다.
안에서는 작가가 그림책 <빛을 비추면>을 직접 빛을 비추며 읽어주고 있었다.
대부분 오픈된 전시장에서 오히려 부스를 반쯤 가린 구성이 신선했다.
사실은 빛을 비춰야 그림이 보이는 구조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오히려 돋보였다.
이제 책은 단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끼고 상상하는 매체가 되어가는 중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향출판’의 ‘옴브로 시네마(ombro-cinema)’ 기법도 무척 인상 깊었다.
그림책 <꽃들의 시간 / 황상미> 위에 필름지를 올려놓으면 그림이 살아 움직이듯 보여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대표님이 어찌나 실감나게 읽어주시던지, 넋 놓고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 보니 다 보지 못한 곳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 사인회를 홍보하던 ‘이야기장수’ 이연실 편집장의 유쾌한 퍼포먼스가 웃음을 자아냈다.
온몸에 리본 테이프를 두르고 익살스럽게 부스를 홍보하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평소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던 터라 이웃집 언니처럼 느껴졌는데,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부스를 돌다 보니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운영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 선하고 밝다는 것.
분명 고된 일정일 텐데도 얼굴에 피곤함보다는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표정’이 있는 게 아닐까.
도서전에 온 사람도, 부스를 운영하는 사람도 모두 책을 사랑하고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니까.
역시, 사람과 책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믿을 구석인가 보다.
잠깐의 ‘출석 도장’이었지만, 도서전이라는 가장 강력한 이벤트에 함께할 수 있어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든든했다.
비록 책 한 권 손에 들지 못했고, 굿즈 하나 사지 못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부유했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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