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문화재 수리 백서 기록 담당자인 강영두가 창경궁 대온실 수리 기록을 맡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수리 보고서가 아니다. 영두의 성장기이자 창경궁 주변 낙원하숙에서의 아픈 기억. 그리고 문화재 수리를 담당하는 건축사무소의 일상. 또 대온실을 만든 사람과 식물원 동물원을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등장하는 한 편의 대하소설 같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이 강을 이루어 ‘창경궁 대온실’이라는 바다로 흘러드는 장편소설이다.
영두의 이야기는 강화 석모도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해, 원서동 낙원하숙에서의 잿빛 청소년기, 그리고 현재의 문화재 기록 업무까지 시간을 넘나 든다. 그 속엔 저마다의 계절과 기억, 다 내 보일 수 없는 마음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읽는 내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영두는 석모도의 유년을 이렇게 표현한다. “해가 일상을 열고 해가 하루를 닫았다.”
내가 보낸 유년과 풍경은 다르지만 우리의 일상은 늘 아침해로 시작하고 저녁노을로 마감하는 게 결은 같다. 그런데 저렇게 표현하니 얼마나 황홀하던지...
페이지 페이지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문장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주옥같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여운이 남는 건 영두와 산아의 대화다.
영두(석모도 헤밍웨이)의 절친 은혜의 딸인 산아는 책을 좋아하는 인공위성 같은 아이다
“사람들은 어쩐지 자주 보는 건 결국 싫어해. 마음이 닳아버리나 봐.”
“너무 잘 알면 오히려 무서우니까, 책임져야 되거든.”
”나는 모르겠으면 그냥 하거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으면 그냥 해"
산아는 마치 어린 영두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선문답처럼 짧고 단단했으며, 그 여운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설 속에는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벌새, 곤줄박이, 흰죽지수리 같은 새들이 등장한다.
영두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데 그게 다 조류 이름이다.
산아 친구 스미에게 영두가 가장 좋아하는 새인 ‘벌새’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흰죽지수리에게는 산아가 좋아하는 걸그룹 ‘마마무’의 이름을 붙여준다. 또 건축사무소 재간둥이 제갈도희는 '곤줄박이'로 불러 준다.
별명을 붙여준다는 건, 누군가를 오래 바라봤다는 증거고 애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영두를 ‘두견새’로 부르고 싶다. 조용히 홀로 있는 듯하지만, 계절이 되면 멀리서 울음을 남기고, 언제나 돌아오는 존재랄까. 영두가 꼭 그렇다.
석모도를 떠나 서울로 상경할 때, 아빠가 서울에서의 생존법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서울에 가면 남들 하는대로 따라 하고, 별스럽게 튀지 말고 무난하게 묻어가라. 몰르면 옆 사람들 적당히 따라 하고, 안 되겠으면 혼자 긍매지 말고 도와달라 그러고…”
그 말은 가진 것 없는 이가 살아남기 위해 익혀야 했던 삶을 대하는 태도같았다.
그리고 울 아부지가 내 곁에서 작게 일러주는 듯 따뜻하면서 아렸다.
서울 원서동 낙원하숙에서 만난 안문자 할머니는 잿물로 흰 옷을 삶던 잔류 일본인이다.
잿물의 비릿한 냄새로 흰 것을 가장 희게 만들던 빨래처럼, 할머니의 삶은 그렇게 견디고 버티는 인생 같았다. 전쟁과 이념, 타지의 외로움을 견디며, 굳게 삶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 “어디에 살든지 뿌리가 없어.”라고 말했던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짠하던지 책을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잔류일본인의 삶을 들여다 봤다.
영두는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낙원하숙을 기억한다. 그 정도로 그곳에서의 생활은 영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아닌 리사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영두를 힘들게 하던 리사.
리사는 영두에게 가장 차갑고 오래 남은 인물이다.
“리사는 비 보다는 눈에 가까운 아이였고, 그 침묵은 얼음에 가까웠다.”라고 쓰여 있다.
'신경증적인 예민함, 미숙함, 오래된 불만족을 품고 살아가는 리사', 할머니 말씀에 '차가운 돌도 3년을 앉으면 따뜻해진다는데', 리사는 왜 끝까지 따뜻해지지 못했을까. 항상 마음이 얼어 있을까?
책장을 덮고도, 출. 퇴근길 문득문득 리사가 생각났다. 리사는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기회가 된다면 리사의 이야기를 더 들려줘도 좋을 것 같다.
풋풋한 영두의 첫사랑 순신.
짜장면을 먹을 때 단무지를 먹지 않고, 삼선 슬리퍼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던 소년.
그 소년을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촌 애라 공돌이랑 연애하네.”라고 이야기할 때, 영두는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했다.”라고 회고한다.
그 한마디에 그들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결론이 어찌 되었든, 마음만큼은 정직했기를. 첫사랑은 언제나 애잔하게 기억되기를.. 그 순간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영두가 힘들 때 낙원하숙 담장에 와서 말없이 기다려 준 순신이 지금 어디에선가 잘 살아주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내가 소설에 빠져 들다니...
어쩌면 스쳐간 일들이 어쩌면 나중에 꼭 다시 조우하게 될 다른 일들과 연결되게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출판사 편집을 할 때 창덕궁과 창경궁에 대한 조사를 하던 일도,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된 일도, 그 이전에 독수리에 대한 조사를 한 일도, 모두 자양분이 되어 차곡차곡 연결되어 있다.
사실 나는 궁궐에 대해 공부하다 우연히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소설 제목에 끌려 책을 읽게 되었다. 특히 창경궁 대온실에서 작가 강연을 하는 유튜브 영상은 너무 인상 깊었다. 대온실 유리 지붕 안에서 펼쳐지는 작가 강연이라니 그림이 근사했다.
맨 처음엔 문화재 수리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의 아픈 과거를 수리하는 이야기였다. 작가는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되는 하나의 건축물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대온실 건물은 그동안 여러 번 철거가 논의되어 왔다. 식물원과 동물원이 과천으로 옮겨갈 때 겨우 살아남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근대 건물이 철거되거나 혹은 폭파될 대 늘 그 목록에 올랐다. 지금은 잔류하지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사실상 모르는 상황이었다.
문화재 수리뿐 아니라 기억도 수리가 필요하다. 사람도, 과거도.
창경궁 대온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읽고 나면 또 읽게 되고, 덮으면 다시 펼치게 되는 책, 처음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전자책을 사서 읽고. 그러고도 모자라 제대로 잘 읽고 싶어 종이책도 주문해서 읽었다. 다 읽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어 책장을 펼치면 다시 또 읽고 있었다. 도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읽은 만큼 정리가 잘 될 줄 알았는데 생각만 많고 정리가 안 되는 신기한 책이다. 너무 몰입한 건지? 작가의 필력에 빠져든 건지, 몇 번을 읽었는데 아직도 나는 책장을 덮을 수가 없다. 펼칠 때 마다 다시 책 속으로. 문장 속으로 빠져 들곤 한다. 참 기이한 경험이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도 오래전에 읽었는데 세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심리묘사를 참 섬세하게 했었다는 기억이 있다. 다시 펼쳐봐야겠다. 이번 국제도서전 창비 부스에 한강 작가 옆에 김금희 작가가 나란희 걸려 있더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언제부턴가 궁능유적본부 사이트가 나의 즐겨찾기 목록에 추가되었다.
이번 가을엔 서울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가보지 못한 창경궁을 찾아가려 한다.
단순히 궁궐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소설 속의 인물들의 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영두와 리사가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춘당지, 낙원하숙의 담장, 순신과 함께 먹던 깡통만두,
아직 남아 있는 원서동 빨래터, 낙원하숙과 비슷한 한옥의 흔적들. 소설 속 장소와 이야기를 돌아보고 싶다.
특히 영두와 리사, 할머니가 드나들었을 창경궁 월근문과 대온실을 찬찬히 걸어보고 싶다.
유월에 읽기 시작한 책을 이제야 정리하고 덮으려니
아직도 영두가 산아에게 설명했던 문화재 수리 용어가 마음에 맴돈다.
“중수는 손질하여 고치는 것. 중창은 다시 짓는 것. 재건은 크게 일으켜 세우는 것.”
나도 지금, 내 안의 기억과 마음을 중수하고, 중창하고, 재건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 지난 봄 창덕궁 낙선재를 관람하면서 내가 찍은 다양한 문이다>
한옥에서 문은 창살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 달라서, 세로살을 꽉 채우고 가로살을 위아래와 중간 안에만 넣은 건 세살물, 가로살과 세로살을 다 채운 문은 만살문. 문 중간에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각형이나 팔각형으로 작은 창을 낸 문은 불발기문. 완(完)자 형태로 살을 짠 문은 완자문, 아 亞자 무늬가 있으면 아자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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