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파일에서 어릴 적 국어 선생님을 만나다.
칠판 한 모퉁이에 시를 적어 주시던...
내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적 국어 선생님은
성직자 같은 절제된 외모에 걸음걸이가 유난히 곧던 분이셨다.
황토색 랜드로바와 고동색 계열의 캐주얼 옷차림이 유난히 잘 어울리시던 분이셨다.
매번 국어 시간이 시작될 때마다
칠판 한 모퉁이에 현대시 한 편씩을 적어 주곤 하시던 분.
그분으로 인해 신경림의 '갈대'를 처음 만났고 김초혜의 사랑굿도 만났던 것 같다.
면 단위 고등학교라 시집 한 권 변변히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그때 그분이 그러셨다.
매주 남들 다 피우는 담배 안 피우는 값으로 시집 한 권을 사신다고
매주 남들 다 마시는 술 안 마시는 값으로 시집 한 권을 사신다고
그분의 넓지 않은 자취방 한 면이 온통 시집으로 가득 차 있던 기억이다.
그래서인가 살아가다 가끔 한 번씩
잊은 듯하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그분 생각이 난다.
지금쯤 경기도 어디메쯤에서 아직도 교편생활을 하고 계실
그 국어 선생님.
언젠가 신촌 모 대학의 윤동주 시비 아래서
졸업 후 생활인으로 변한 제자와 스승관계로
잠깐 선생님을 뵌 후론 한 번도 뵌 적 없는 그때 그 국어 선생님.
예전 시를 적어주시던 시간이 기억난다고 했더니
요즘은 칠판 모서리에 현대시 한 편을 적었다간
진도 늦는데 무얼 하느냐며 능력 없는 선생이라고 낙인찍히는 세상이라며
씁쓸해하시던 국어 선생님.
가끔 한 번씩 신간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시인의 이름을 꼬박꼬박 확인하곤 한다.
혹시 내가 아는 그분의 이름이 그곳에 또렷이 적혀 있지는 않나 해서...
괜히 그분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밤이다.
문득 그분의 집에 가득 꽂혀 있을 시집 무덤을 보고 싶은 밤이다.
지금쯤은 제법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있어
예전 같지 않겠지만 그 속에 숨어 있을 랜드로바 차림의 국어선생님을 만나보고 싶다.
*어느 해인가 스승의 날 감사 메일을 주고받을 때, 기다리던 선생님의 시를 한 편 배달받았다
선생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계셨었나 보다.
(오래된 파일을 찾다가 예전 글(2008년)을 만났네요. 다시 읽어도 그 때, 그 마음이 좋아서 올려 봅니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셔서 무언가 열중하고 계실 것 같은 예감입니다.
이런 글이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늘 그리운 나의 국어 선생님)
봄 추억에 관한 명상 1
나 성 훈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인지도 몰라.
그 이름 석 자
나즉이 불러보면
입속에서 화-하니 박하향기 감돌았고
지금도 그 시절을 떠- 올리면
가슴은 아련한 봄꽃 향내 천지.
함께 했던 순간들 봄비에 젖어드는데
피아노 건반 위 높은음 자리로
가쁜 숨 몰아가며 올라다가가
그만 그 사람에 취해버린
황홀한 반칙.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인지도 몰라.
수줍은 첫사랑 그 이름 쓰면
편지지(片紙紙)가 복숭아꽃 빛깔로
곱게 물들던 그 시절 말이야.
(2008년에 선생님이 메일로 보내왔던 자작시)
#국어선생님 #칠판한모퉁이에시를적어주시던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