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던 집

그림 같은 집, 기억 속의 집, 따뜻한 집!

by 따오기

Ⅰ. 어릴 적 꿈꾸던 그림 같은 집.


이런 집에 살고 싶었어요.


특별히 큰집이나 비싼 집이 아니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제철 꽃이 차례로 피는 집.

추운 겨울엔 꽃이 없으면 담장이나 나무 위에 눈꽃이라도 피는 집.

특히 봄엔 하얀 목련과 여름엔 빨간 넝쿨장미와 하얀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집.

가을엔 보랏빛 소국과 낮은 키의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피어있는 집.

마당에 간혹 새들이 날아와 지저귈 수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는 집.


아주 추운 겨울날에도 따뜻한 물 졸졸 나와 찬 손 녹여 주고

더운 여름엔 찬 물로 시원한 등목 할 수 있는 요술 같은 집.

바람이 불면 바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빈 틈이 있는 집.

간혹 조용한 밤중에 이웃집 부부싸움 소리도 들려오는 집.

그렇게 바람소리 사람소리 들으며 부대끼고 살아갈 수 있는 집.


마루엔 다양한 읽을거리와 볼거리가 쌓여 있는 집.

어려운 책은 별로 안 좋아하니 읽기 쉬운 시집이나, 가볍고 오래된 잡지,

고상한 척 뒤적일 수 있는 금장의 고전문학이나 에세이들

그리고 궁금한 건 바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전*들이 꽂혀 있는 집.

(2001년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상황이 아니라 검색보다는 사전 찾기가 우선이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의 취향대로 내 드릴 수 있는 여러 종류의 茶가 준비되어 있는 집.

네 모퉁이 벽 중 한쪽 면은 하얀 회벽으로 두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는 열린 공간으로 비워둔 집.

주인의 손때, 마음 때가 그대로 묻어나도록……


마루 한 모퉁이엔 오래된 전축에서 낮은 음의 추억이 흘러나오는 집

너무 깔끔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사람냄새가 나는 편안한 집.

어릴 적 자주 보던 한옥 지붕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은 그런 집.


마루엔 넓고 안락한 소파 하나 없어도 온 가족이 뒹굴 수 있는

간단한 면 쿠션 몇 개 놓여있어, 편안히 쉴 수 있는 집.

그래서 덩달아 맘이 넉넉해지는 집.


이런 집이 내가 어릴 적 꿈꾸던 집이에요


내가 살고 싶은 집이 그리 어려운 건축구조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계절 내내 꽃피고 지게 하려면 작은 마당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코스모스를 심으려면 땅도 많이 필요할 테고

그러려면 서울에선 좀 힘들 것 같고

그냥 시골 나의 고향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


그렇게 어릴 적 자란 고향 집은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는

결국 모든 꿈이 그곳으로 통하는, 꿈의 원천인가 봐요.



Ⅱ. 어릴 적 내가 살던 집.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 양옆엔 코스모스가 내 키보다 크게 자라

길을 거닐면 나를 호위하듯 피어 있었어요.


지금 그 길은 딱딱한 회색 콘크리트 언덕으로 변했지만.

제가 살던 시골집은 우리 동네에서 젤 위에 있는 '맨 꼭대기집'이었어요.


우리 동네 할아부지들은 나를 '오목골 맨 꼭대기 최씨네 막내딸'이라고 이름대신 불러주곤 했었어요.

우리 집 뒤란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자리한 산만큼이나 큰 밤나무가 있었고,

앞마당엔 개울이 있어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자장가로,

때론 교향악으로 들으며 친구처럼 지냈어요.


바깥 마당에 아담한 크기의 소나무 한 그루와 대추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우리 집을 지나치는 이들이 山寺인 줄 알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런 우리 집을, 돌아가신 아부지께서는 술만 드시면 '춘향(행)이 집'이라고,

남루하다고 말씀하셨더랬어요.

겉모습은 정말 아주 작은 산사 같은데

속은 아주 남루한 춘향이 집 같았거든요.


지금도 그 집은 그때 그대로 별로 변한 것 없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늙어가고 있어요.

매번 명절 때면 형제들끼리 회의를 하지만

언제나 엄마의 고집을 이기는 자식은 아무도 없어요.

이번 추석에도 우리는 늙어가는 집을 허무는 대책회의를 할지도 몰라요.

그곳에 사는 울 엄마는 이번에도

'살 날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라고'. 반대를 하시겠지만……

그래도 매번 엄마의 고집을 못 이기는 자식 입장은 참 죄송스럽습니다.


어릴 적 그 집을 아직도 갈 수 있는 건 좋지만,

엄마의 불편을 대신해 드릴 수 없으니...

그렇게 제가 살던 우리 집은 좋은 기억과 안타까운 마음을 다 담고 사는 집이에요.

마치 엄마같이...



Ⅲ. 각자의 마음속의 집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집.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 있는 집.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머무는 집

오늘내일 찾아갈 고향집.

모든 떠오르는 집들이 '따뜻한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정겨웠으면 좋겠습니다.


집의 외양보다 더 중요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였음 참 좋겠습니다.


2001. 9. 27.

house.jpg 정확히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 고향집 터 (안채는 사라지고...)

2001년 9월에 그려 본 집에 대한 생각들이에요.

지금 그 집은 아버지의 소유에서 조카의 소유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고

리모델링을 해서 어릴 적 추억이 많이 훼손 됐어요.


부모님의 집은 제 집인데

조카의 집은 제 집이 아니더라고요.


이젠 기억에만 있는 집이 될 것 같아요.

한사코 집수리를 마다하시던 엄마도 이제 그 집에 안 계시고

추억과 사진 속에만 유년의 고향집이 남아 있어요.


점점 우리네 집은 개인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고

사는 곳은 권력이 된 지 오래예요.


사계절 내내 꽃 피는 집을 그리던 22년 전의 저는

어느새 너무 많이 변해 버렸어요.

대신 아파트 화단에 철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나무로

계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저,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거,

멋진 여행지에서도 가고픈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야겠지요.


당장 꽃피는 삼월에 또 계약기간이 도래해 이사를 해야 해요.

현재 사는 곳 근처로 이사 갈 계획이지만

확정되지 않은 나의 집은 따뜻함 보다는 막막함으로 다가오네요.


평생 안락한 집을 꿈꾸며 살아가는 게 소시민의 바람인가 봐요.

집이 대체 뭐길래…


그저 내 몸 맡기고 추위 더위 피해 가며

우리 가족 쉬어 갈 평범한 집이면 되는데 점점 생각과 상황이 바뀌니 말이에요.


어쩜 집은 '주거' 그 이상의

꿈이고 가족이고 우리 삶이 전부 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매일 집에 관한 뉴스가 넘쳐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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