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다>로 보는 아이스티의 변신
아샷추는 아이스티에 에스프레소 원샷을 추가해
첫맛은 달고 끝맛은 쓴 오묘한 맛의 음료다.
2022년 첫 출시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으나
호불호가 많이 갈렸던 이 음료는
2024년 현재
프랜차이즈와 개인 카페에
없어서는 안 될 메뉴로 거듭났다.
아샷추가 보여주는 창의력은
우리가 정상적이라 생각한 것들의
조합으로 시작된다.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티의
정상적인 레시피가 만나
쓴맛과 너무 달다는 단점이 개선되고
맛있는 음료가 된다.
이는 대학생이라면 지녀야 할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게는 공모전에 도전할 때 활용되는 관찰력이자
크게는 사회에 나가면서 국어국문학과 학생으로서
새로운 글을 쓸 때 요구되는 자질이다.
그러나 나는 이 능력이 부족한,
아니 부재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지나치게 깊게 생각하는 버릇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강박증에서 비롯되었다.
이 강박증은 최근엔 상주시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2주라는 시간을 잡아먹고 마감 직전
촉박함을 내게 안겨주며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정상성의 범주는 보편성을 강요한다.
삶을 살아가며,
생각을 말하며
정상이라는 말은 자주 사용하는 만큼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말은 누구의 기준일까?
우리는 평범한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기에
정상에 범주라는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
여기서 정상의 기준을 세운다면 어떤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은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인문대학을 기준으로
정상을 설명해보자면,
우리 학교 1층 강의실의 일부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갈 수 있으며,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교과서와 화면에 나온
교수님의 자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걷기 힘들고,
귀가 안 들리거나
눈이 안 보이는 경우
우리 학교의 수업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없다.
정상의 범주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 주관적인 면모를 보인다.
다만 모든 사람이
평균적인 신체와 오감을 갖고
태어나기에
주관적인 정상은
보편성으로 치환된다.
우리 입장에서
문제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보기에 '결여된', '불편한'
장애인에겐 모순덩어리로 다가온다.
나는 상주시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도시 계획을 구상했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들은 일반인의 정상성에서
바라본 편견이 담긴 시각이었다.
장애인을 무력한 존재로 그리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그들을 배려하는 대중교통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정한 정상성의 범주 아래
장애인들에게 보편성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내겐 '아샷추'처럼 정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창의력이 필요하다.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티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두 음료가 만나 '아샷추'라는 새로운 음료를
만들어냈듯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 발짝 물러나 의문을 노력할 수 있는
관찰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많은 도전을 접하며 때론
실패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사이보그가 되다>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음료를 만날 때 난 '아샷추'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내 생각은 한 단계씩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인문대학의 모순점을 파악하고
각 단과대학 별 편의성 문제를 고찰하는 등의
활동을 진행하면서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창의력을
'아샷추'를 통해 이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