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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Jun 19. 2024

‘나이’를 받아들이는 법

하다못해 성별도 바꾸는데 나이가 뭐 대단한 것인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이를 묻는 일은 일상인데 남도 아닌 내 나이를 모르겠어서 슬쩍 검색하거나 띠를 말하곤 한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모임에나 나이 전문가들은 존재하기 마련인지라 나 대신 내 나이를 말해주는 친절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자주 만나는 귀인이다. 하지만 남의 입으로 말해주는 나의 나이는 이번에도 역시 스쳐 지나가고 다음번 모임에서도 나는 내 나이를 답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나는 내 나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걸까?


 같은 반 아이들과 대부분 같은 나이였던 고2 때 회사에 취직했다. 취업 후 3년이 지나 대학에 입학했고, 주변의 나이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 친구들은 4학년 졸업반. 나는 1학년 신입생. 돈을 벌다가 대학에 들어온 나에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들어온 동기들은 너무나 어리디 어려 보였다. 그때는 3살 차이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양, 동기들을 동생 다루듯 했는데. 그 이후에는 취업으로, 결혼으로, 친구들의 나이가 제각각이 되어 버려서 이제는 몇 살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나이가 같으면 엄마들의 나이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관심사가 같다면 성별과 나이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런 이유들로 나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자각 못 하는 일이 꼭 나쁘게만 생각되진 않는다. 오히려 전보다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다. 친구의 범주가 나이를 뛰어넘을 수 있으니.

 아무튼 내가 나이를 자각하든, 못하든. 그것은 매번 잃어버리는 머리끈처럼, 없어진 줄 알았는데 늘 어느 구석에서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력서에서 나타나서 할 일을 제한하고, 새로이 인사하는 모임에서 나의 위치가 막내가 아님을 알려주며, 시린 치아와 노안,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노화’도 알려준다.


또한 ‘나이’는 범주를 정해주는 듯하다. 해서 나는 서른 즈음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고 느끼지만, 나의 활동 범주는 중년으로 정해진다.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이미 성적표처럼 나와 버린 것이다. 마흔다섯의 나이가.     

 마흔다섯 살, 올해 내가 받아 든 성적표의 타이틀이다.


 나의 것이라도 그중 이름은 정정할 수 있고, 성별도 정정이 가능할 수 있을 테지만, 나이만큼은 정정 불가하다. 얄궂은 놈이다.  나를 지칭하는 이름도, 내가 가지고 태어난 성별도 바꿀 수 있는데 유독 나이만큼은 어쩌지 못할 만큼 중요하다는 건가? 정정의 가능 여부로 생각해 보자면 이름도, 성별도 내가 가진 개인적인 부분이고 ‘나이’는 사회적인 부분이어서 그런가 싶다.

내 개인적인 것은 취미, 취향, 식성처럼 고정이 아니고 변동이 가능한 것인데 사회적인 ‘나이’는 개인이 바꿀 수 없는 변동 불가한 성질인 듯하다.

  

그러니 내가 받아들이기 어색한 나이라도 주어지는 그 나이 그즈음을 잘 살아 내는 일이 사회에 이로운 일일 테다.

중년에 기대되는 행동을 할 것. ‘어른’ 다울 것. 좋은 ‘엄마’가 될 것 등.

내게 주어진 일을. 그 시간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또한  나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이다.

정확히는 그것이 내가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일일 것이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보다는 열심히 살면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이를 인정 못하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날 중년의 내 모습을 나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날도 올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 - 네가 무엇이길래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는 거니? 죽음을 각오한 수술로 성별도 바꾸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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