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의 한국 복귀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무는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하는 불안감에
하루에도 열두 번 한숨을 쉬며
그냥 같이 들어가자 말한다 했지만
사모에게는
입시를 코앞에 둔 아들이
우선이었기에
그동안의 고생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도
남는 게 맞다며
씩씩한 목소리로 걱정 말라고
상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나와의 통화 속에선
진심이 철철 흘러넘쳤었지.
난 이제 남편도 없는 여자라는 둥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냐는 둥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전무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로 잘 지냈던 우리 부부와
고차장 부부에게
밥을 사겠다 하셨는데
고차장네는
개인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했고
우리 부부 하고만
자리를 함께 하게 됐었다.
그 시골마을에서
제일 고급이라는 레스토랑을
잡으셨더라.
우리 넷은 오랜만에 멋 내고 앉아
하하 호호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그날이 나이겐
너무나 뿌듯한 자리였다.
물론 남겨질 부인을 위해서
기름칠이 필요하겠단 생각에
마련한 자리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무네 집사를 자처하며
여기저기 손드는 사람들은
다 제치고
우리 집만 밥을 사줬으니 말이다.
본인들에게 누가 진심인 건지
알아봐 주는 듯해서 기뻤고
사모와 함께
흙탕물에 뒹굴었던 아픔이
이렇게 보상을 받는구나 했으며
무엇 보다도
그동안 쓰레기들에게 시달렸던
내 개고생이
결국은
내조가 되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전무가 떠나는 날
일부러 사모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텅 빈 마음에
같이 떠들 사람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나 같으면
그냥 조용히 정리하면서
빈자리를
의식하고 싶지 않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잘 주무셨어요?"
다음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모의 목소리는 밝았다.
"아직도 가고 계시는 중이겠네요.
어젠 일부러 전화 안 드렸어요.
괜히 속 시끄러우실까 봐..."
"알아.
너 전화 없길래 그런 건 줄 알았어"
전무가 떠나는 날
전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고
손 든 사람이
여럿이었다 하더라.
뭐 그동안 쌓은 정과 의리 때문에
뭐라도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일 수도 있으나
글쎼...
내 남편?
손이 어찌나 무거우신지
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길래
이 정도 액션은
좀 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그 시간에 회의 있다면서
단칼에 차단하더라.
결국 간택당한 사람은
그해 여름에
주재원 부족에 새로 합류한
장 과장과 최 차장이었다.
그 둘은 전무집으로 가서
짐 싣는 걸 도왔는데
출발 전
전무와 사모가 부둥켜안고
올라오는 감정에 울고 있으니
그걸 보고
뒤돌아 눈물을 훔치더라 했다.
"우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는데
그 둘이 눈이 벌겋더라고~~"
그렇게 전무는 떠났고
회사 분위기는
어미 잃은 새끼들 마냥
회식 같은 것도 일절 없이
조용히 각자도생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겨울이 되면
곧 떠나야 하는 입장인지라
그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총대를 멜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지.
사실 사모는
우리가 떠나는 걸 반겨하지 않았다.
사모는
누군가에게 올인하여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알다시피 그지 같은 주재원 부족에서
그래도 가장 믿고 있었던 게
나였기 때문에
전무도 떠난 상황에
나까지 떠난다는 게
좀 힘들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이 자꾸 학교를 옮기는 건
절대 좋은 게 아니니
(한,미국을 오가며 3년마다 이사)
남편만 새 발령지로 보내고
주말부부를 하라는 말도 했지만
내 남편은
가족은 무조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마인드라
그 사이에서 나만
잠시 곤란하기도 했더랬다.
물론
사모를 이 구렁텅이에 혼자 두고
나만 탈출하는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고.
9월이 되면서
우리 집 앞마당엔
Sale표지판이 붙었다.
집주인이
우리가 떠나는 시점에 맞춰
집을 내놓은 것이다.
그랬더니
남 얘기 궁금해 미치는
하이에나들이 낚였네.
"블래스미,
나 J 만나고 왔어"
그 둘은
아직 서로 연락 중이었다.
물론
사이좋은 통화 말고
서로 염탐하고 감시하는 통화.
J는 웬일로
자기가 밥을 사겠다 말하며
만나자 했다더라.
그 속이 궁금했고
피할 이유도 없기에 나가보니
J는 내 얘길 꺼냈다고 했다.
"걔 아직도 너희 옆집 드나들지?
너희 집에 Sale 붙었다면서
너 한국 들어가냐 묻더라?"
회사 회의실에서
민낯을 다 까발렸던 그날 이후로
이 차장은 회사 내에서
존재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아웃사이더가 되었고
남편의 재 발령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게 아니라서
소식이 어둡던 참에
집 앞에 붙은 Sale사인을 보고
주재기간 다 채웠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다 대고 사모는 또
걔네가 너네 같은 줄 아느냐
날카롭게 쏴주었다고 하네.
J가 가장 바랬던 게 뭔지,
무슨 생각으로
이 깡 시골로 나오고 싶어 했는지
난
사모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새로 발령받은
살기 좋은 그 지역으로 옮겨가
영주권 지원받고 뿌리내리는 것.
하지만
자업자득으로 영주권 지원은커녕
주재 연장도 퇴짜맞고
곧 있으면
한국으로 쫓겨 나가야 하는
신세가 된 거지.
"내가
너희 인정받아서
새로 발령받았다고 말해줬어.
그래서
니(J)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그 지역으로 가게 됐다고"
J의 마음에
사모는 불을 지른 거다.
"그랬더니 뭐래요?
표정이 어때요??"
잠깐 멍하니 처다 보더니
진짜냐 다시 물다고 했다.
표정은
뭐 당연히 똥 씹은 얼굴이었고.
"근데 너희 옆집도
너 이사 가는 거냐 묻더라는데?"
그렇게 사고를 치고도
또 남의 일이 궁금해서
만나자고 한 거냐
한 소리 하는 사모에게
J는
내 옆집에 살고 있는
아리엘 엄마(한인)가
기도하러 만난 날 묻길래
(같은 교회, 같은 기도모임)
자기도 묻는 거라고 했다 하더라.
"야!
니네 옆집도 이상한 여자야!
그걸 왜 너한테 직접 안 묻고
J한테 묻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아무리
J와 친해진 그 이웃집과
점점 거리를 뒀다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묻게 할 만큼
티 내지도 않았거니와
인연으로 쳐도
나랑 먼저 쌓은 인연이 먼저이고
주고받은 음식이나 호의들 또한
내 쪽이 더 넘칠 텐데 말이다.
이유는 뻔하지 않나.
J의 작품이라는 거.
도대체
그년이 내 이웃집에
무슨 소릴 얼마나 해 놨길래
저러는 거냔 말이지.
그 말을 듣고
J도 짜증 났지만
이웃집도 꼴 보기 싫더라.
너희 두 집이 모여
내 얘기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알려주고 싶었고
나 대신 선택한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 까발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바로 행동개시.
옆집여자가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시간을
나는 알고 있기에
우연히 마주친 듯하려
시간 맞춰 밖으로 나갔네.
그랬더니
딱 맞춰 그 집 차고가 열리고
그 집 여자가 탄 차는
후진으로 슬슬 나오는 중이었다.
"어머! 아리엘 엄마~"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유~~ 잘 지냈어요?
제가 지금
아리엘 데리러 가는 길이라~"
급해서 가야 한다는 말투였지만
작정하고 나온 나였기에
무시했다.
"저는 잘 지냈어요!
저희 남편이
회사에서 인정받아서
승진도 하고 잘 됐거든요!
그래서
다른 곳 책임자로 재발령 나서
이사 가는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웃으며 잘됐다 축하한다 하더니
또 애 픽업에 늦어서
급하게 가는 참이라는 말로
벗어나려 하더라.
"근데 아리엘 엄마!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이차장이랑 J한테 묻지 마시고!
그 집 여자가
얼마나
없는 말을 만들고 다니고
이간질을 하고 다니는지
저희 회사 주재원들은
다들 알고 피하는 여자거든요.
저희가 바로 옆에 사는데
뭣하러 그런 여자한테
저를 물어요?!"
내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로 말했고
그 순간
운전석에 앉은 이웃집 여자는
나를 올려다보며
벙찐 듯
꿈벅꿈벅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린 만나면 기도만 하지
절대 다른 사람 얘기 같은 건
안 해요.
우린 기도하는 모임이니까~"
내 얘기했냐 안 했냐
따져 물은 것도 아닌데
동문서답으로 저리 말하니
내 얘기한 거 맞네 싶었다.
하여튼
거짓말도 똑똑해야 하는 거야.
"아뇨~~
아리엘 엄마가 나에 대해 물었다고
J가 이미 다 말했는데
모르시나 보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궁금한 건
저한테 직접 물으시라구~.
어쨌든
그건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시구요
늦겠다 얼른 가 보세요"
"와서 전화할게요.
우리 만나서 다시 얘기해요!"
나를 쳐다보며
후진하는 이웃집에게
웃으며 손 흔들어 줬다.
그리곤 뒤돌아 서서
더 활짝 웃었지.
나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뱉었다.
이 차장 입에서는
승진이니 뭐니
한 마디 안 나왔을 텐데
내 남편은
능력 인정받아 승진했고
좋은 곳으로 발령도 받았다는 거
너가 좋다고 만나는 J가
주재원들 사이에서는
더러워 피하는 여자라는 거
너희가 모임을 한다는 것과
만나서
우리 집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난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
그리고 난 그걸
J 통해 들었으니
넌 뒤통수 맞은 거라는 거
미션 클리어!
속이 얼마나 후련하고
유쾌 상쾌 통쾌하던지.
딸에게 운전해 가는 길이
제정신으로 가는 게
아닐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말이다.
그날 맥도날드 대첩 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삼켰던 게
한이 됐는데
오늘 그것까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네.
그러고 나서 40분쯤 지났을 때
이웃집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받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에도 걸려오고
다음날 아침에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문자를 보냈더라
이사 가기 전에 얘기도 할 겸
커피 한잔 하자고.
이사 준비로 바쁘고
지금도 나가봐야 한다며
상냥하게 다
거절 거절 거절.
이유는 간단했다.
그날
이웃집여자는 시간이 없기도 했고
무방비 상태였기에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시 만난다면
그건 그 이웃집 여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는 꼴인 거지.
자기도
미친놈으로 매도당한 거 같아서
풀고 싶을 테고
무슨 말을 할지가 뻔한데
지 속 편하자고 떠드는 얘길
내가 왜 들어줘야 하는데?
왜??
그 후로도
전화가 몇 번 더 오더니
계속 받지 않자
더 이상은 걸려오지 않았다.
J와 이차장이 원했던 그 목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가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은 모든 희망이 잘려나간 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세고 있으니
그 기분이 어땠을까.
그런 말 있지?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최고 복수라고.
내가 같은 수준으로
해코지 한다 해도
코웃음 한 번 치고 끝낼
인간들일텐데
단단히
한 방 먹인 꼴이 된 거 같아
매일 그 생각에
히죽 히죽이었지.
1+1으로
옆집까지 해결한 것도 모자라
그 두 집들이
풀어야 할 얘기가 있는 걸로
끝을 맺었으니
그날의 내 복수혈전 평점은
5점 만점이었고
후속 편이 기다려지는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