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호락은 인생 몇 페이지인가요?

by 블레스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하나하나 마무리되어 가면서

그것들이 또 다른 날들을 가져오니

주재원 부족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국으로 들어간 직원들을 대신해

여름이 되자

새로운 사람들이 발령받아 나왔고

그로 인해

판이 새로 짜인 모습이었지만

모두를 통솔하는 전무가 없으니

회사에서 서로 인사만 해도 다행인

어색한 관계들이었다.




우리도 곧 떠날 처지라

나서서

통합의 장을 만들 상황은 아니었고

한 번 진흙탕에 나뒹굴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오히려 난

서로 멀리 지내는 그 데면함이

좋고 편했다.




하지만

대면함에 예외 대상은 있었지.

바로 사모.




그렇게 서로들 교류 없이 지내면서

사모에게는

안부 전화와 방문까지도 하고 있던

뉴페이스들이었다.




전무 없이 홀로 지내시니

이건 그들에게

찬스가 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지.




그냥 좀 다르네 싶었던 건

사모에게 전활 하고 찾아가는 게

그 집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이었다는 거.




좀 특이하네?

이런 걸 세대차이라 하는 걸까?

했지만

워낙 집사를 자처하는 인간들이 많았고

전무가 한국으로 떠날 때

공항까지의 라이드를

뉴페이스들(장과장, 최차장)이 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더랬다.




그러다 사모는

여자들끼리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난여름 내가 한국에 간 사이에

새로 발령받아 온 장과장의 부인 N과

최차장의 부인 K는

사모에게 인사를 드리겠다며

함께 브런치를 했었고

그때 사모는 나에게

모두가 모이는 자릴 만들겠다고

말했었지.




"어떤 애들인지 너한테 보여줄게.

그리고 이번엔

밖에서 정식으로 할 거야.

저번에 했던 거처럼

우리 집에

퍼질러 앉아서 하는 거 말고

정식으로!"




사모는

S와 J가 새로 나오던 시점에

나를 포함해서

기존에 있었던 여자들까지 모두

사모집으로 불러

커피 마시며 인사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사모는

우리끼리 편하게 모이자는 뜻에서

집으로 불렀던 거였고

본인이 분위기 잡고 있으면

다들 어려워할 거란 생각에

푼수끼 다분한 행동으로

우릴 맞이했었지.




그런데

S와 J가 벌였던 맥도날드 대첩 이후로

사모는 그때의 본인의 선택을

무지하게 후회했었다.

그때

그렇게 풀어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밖에서 분위기 잡고 만나

기선제압을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하고 말이다.




"이번에는 존댓말 해 가면서

똑바로 할 거야!"




그렇게 당하고 보니

나도 그게 낫겠다 싶었지.




토요일 오후 2시,

자주 가는 커피숍으로 장소가 정해졌고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준비해 놓고 있으니

사모와 고차장의 부인 L이 도착해

우리 셋은

먼저 음료를 시키고 앉았다.




그러다

처음 보는 여자 둘이 한 명씩 등장했고

사모는 L과 나에게 소개를 해줘서

우린 서로 첫인상을 위해

활짝 웃으며

형식적이고 전형적인 인사를

주고받았었지.




장과장의 부인 N은 장과장과 CC로

인사팀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단기 휴직을 내고 나온 상태였고

대화 내내 웃는 낯으로

되게 싹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뭔지

한국으로 돌아간

염차장의 집을 이어받아

살고 있더라.




최차장의 부인 K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사직하고 따라 나온 상태였는데

사모의 귀띔에 의하면

남편보다

사회적으로 더 잘 나가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가방이며 액세서리며 화려하던 K는

말 수 없이

조용히 대답만 하는 스타일.




그렇게 여자 다섯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L과 나는 기존 멤버라

딱히 풀어놓을 이슈가 없는

사람들인 데다가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사람이었기에

한 발 물러나서

주로 듣는 쪽이었고

뉴페이스들의 신상이라던가

발령 전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아무래도 K 보다는 N이

더 말 수가 많은 관계로

사모와 주고받는 대화가 많았더랬다.




심지어 같은 회사 CC이니

이 사람 아느냐,

저 사람 아느냐 해 가며

대화 내용은 다양했었지.




그러다 전무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들은

아랫사람으로서 내 보이는

존경의 찬양을 쏟아 냈는데

그 과정에서 N은 자연스레

전무를 '전무님'이 아닌

'SY'라고 부르고 있었다.




'SY'라는 호칭은

직원들끼리 전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전직 대통령을

이니셜로 부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직 대통령 당사자나

그 가족 앞에서는

그 이니셜을 사용하지 않듯이

그날 N이 사모 앞에서

전무를 SY라고 부른 건

내 기준에서 큰 실수였지만

사모 표정은

개의치 않아 하는 듯 보였다.




사석에서는 워낙에 많이들

이름이나 직함대신

SY라고 불렀고

사모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했네.




그러다

사모는 나를 가리키면서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날 사람이라 말하며

참 많이 의지 했는데 떠난다고 하니

본인의 마음이

안 좋다는 얘길 하더라.




그러면서

상무가 전무로 승진했을 때

내가 사다 드렸던

축하화분 얘길 꺼냈다.




"블래스미,

니가 준 화분 잘 키울게.

너무 고마워"




"그냥 화분인데요 뭐~

여기서 같이 보낸 시간 생각하면

그 정도도 못하겠어요?!"




왜 갑자기 내 얘긴가 싶어

살짝 당황스런 포인트였지만

가볍게 넘겼더랬다.




그렇게 내 이주에 관련된

그리고

나와 사모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무덤덤히 듣던 K와는 다르게 N은

백가지의 표정과 제스처로

반응하고 호응하던 모습이었던 게

지금도 참 인상 깊네.




그래서 그랬는지

사모의 말은 길어졌고

그 자리는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집에 오니 기운이 없더라.

사실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

마음이 뜬 것도 있었고

아무하고도

더 이상은 알고 지내고 싶지 않아

나 몰라라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그래도

그곳에 남을 사모를 위해서

질서는 유지되어야 했기에

열외 없이 참석했던 거였다.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N과 K에게서

오늘 반가웠다는 문자가 왔고

그것에 답장하고 나니

사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니까 어때?

걔네 어떤 거 같아?"




"뭐 그냥 무난해 보이던데요~

K는 말이 없어서 그런가

차분해 보이고

N은 뭔가

눈치가 빠삭해 보이더라고요.

근데 말하는 거나 행동이

확실히 요즘 애들 같았어요.

근데 사모님!

N이 단기휴직을 했다던데

회사에 그런 게 있어요?

3년을 휴직할 수 있는 회사는

없을 텐데??"




"그러게~

나도 남편한테 물어봐야겠다

나는 어땠어?

실수한 거 없디?"




뉴페이스들의 행동거지를

나는 처음 보는 것이니

비교할 게 없어

그런가 보다 하고 본다지만

그날 사모의 모습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카리스마 자체였다.




올 블랙에 검은색 재킷까지 걸치고

하얀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

안 그래도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더 얼어붙어 표출되고 있었고

허리도 내내 곧추세워 앉아

풀어주는 표정 하나 없이

말투 또한

딱딱 끊어지게 내뱉었기에

나 조차도

조심을 떨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L이 분위기도 풀 겸

그 두 집에다가

아이들은 어떠하냐 묻자

사모는 나무라는 말투로

그렇게 애들 얘기나 하자고 모인 거

아니라며

딱 끊어 냈고

잠시

무안의 정적이 스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내내 강조한 건,

여기서

각자 서로

개인행동으로 사고 치지 말고

잘 지내자는 것.

전설의 케이스가 되어버린

S와 J를

간접거론하면서 말이다.




말투며 행동이며 차림새가

아주

맘을 단디 먹고 나오신 모양이었지.




"사모님,

오늘 분위기 딱 잡으셨던데요!

그때와는 딴 판이었어요"




사모도

본인이 의도한 대로 나왔다고

생각이 드는 듯했다.




근데 지금 보면

그렇게 위계적으로

분위기를 제압했던 게

시대착오적인 실수였구나 싶네




지금 말로 MZ였던 그들을

꼰대 마인드로 대응했던 거 아니었나

싶다는 말이야.




옛날엔 먹혔지만

이젠 먹히지 않는,

우리 세대엔 통했지만

이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나 때는 당연한 거였지만

이젠 라떼가 되어버리는.




그날은

또 다른 파란만장의

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