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엔딩을 위하여.

by 블레스미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내 남편은 이제

이 회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사장이고 뭐고 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

죄다 모르는 사람이야.

이제 끝났어 끝."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알아?




'그럼 내 남편은요!

이제 내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냐구요!'




역시

검은 머리는

거두는 게 아니라 했던가.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제일 먼저 걱정되는 건

더 이상

전무와 사모가 아니었다.

내 남편이었다.




아니,

내 남편에게

전무가 한 약속이 있는데!

그게 바로 코 앞인데!!

이렇게 끝난다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뛴다는 말이

어떤 건지 알겠더라.




눈이 질끈 감기면서

내 고개가 떨궈졌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내 왼손은

바닥을 향해 고꾸라진

내 이마를 받치고 있었지.




짐작은 했지만

제발 아니길 바라던 결말을

듣게 되니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생각하지도 못 한 진행 전개에

모든 말은

가슴에서 꼬이고 엉켜

답답했다.




목 위로

어느 한마디조차

비집고 나오질 못하는 상태로

막혀버린 느낌.




사모의 생각엔

이미 작년 말에

이 일이

회사로 전달된 거 같다고 했다.




휴가를 내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전무였기에

바로 전달할 순 없었고

마치 배려하는 듯

되돌아오면 이야기하자며

기다리는 시간 동안

회사에서는

전무의 거취를 결정한 거 같다고.




그러니

돌아오자마자,

새해 첫날 출근을 하자마자

이렇게 일사천리로

내동댕이 쳐진 거 아니겠냐며

소리를 쳤고

내 남편이

회는 일에 얼마나 정성이었데

어쩜 이럴 수 있냐며

울화를 쏟아 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무뒤에는

부회장이 있으니 말이다.




충분히

막아 줄 수 있는 입장이고

그래 줄 수 있는 관계

아니었던가??




아무리

밥 먹는 것보다 쉬운 게

임원직 해고라지만

그의 공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잠재력으로 보나

회사 입장에서 전무는

한 큐에 내 보낼 사람이 아닌데

어떠한 다른 타협이나

중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이미

해고가 정해진 듯한

분위기였기에

전무는

부회장과의 면담 동안

적극적인 해명을

한 거 같진 않았다.




다만,

필요한 정도의

소명만을 하면서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떠안고 나가겠다

말했다네.




난 애가 타 들어가고

사모와 전무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왜,

위에다 적극적으로

고할 생각은 안 했던 건가?




정 안 되면

부회장에게 사적으로

매달릴 수도 있지 않았나?!




전무는 그 당시

본인이 버텨서 일이 커지게 되면

사모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럼 그게 더 최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더럽고 더럽지만

그냥 이까짓 회사

그만두는 걸로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깔끔한 거라 판단한 거지.




내 마음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제부턴

사모와 전무의 일이 아니라

내 남편의 일이 되었고

우리 가정의 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모에게 말할 순 없었다.




전무가 해준 약속에 대해

사모가 아는지 모르는지

난 알 수가 없었으며

어쨌든

지금 물어 뜯겨

피를 흘리고 서 있는 건

사모였는데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그 앞에서

내 남편을 책임지라는 말을

하진 못하겠으니 말이다.




핸드폰을 들고

사모와

같은 얘기를 하는 중임과 동시에

우린 각자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난 부회장만 잡아 댔다.




어쩜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그렇게 긴 시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직원이 당했는데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쩜 그렇게

모르는 척할 수가 있냐고.




그랬더니

사모도 처음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입장 바꿔보니

부회장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인 데다가

불똥 튈까 봐 손절하는 게

정글의 법칙인 거 아니겠냐 말하네.




어쩌다 이 일이

매스컴에 흘려져

이니셜 ABC가 되어서

등장이라도 하는 날엔

회사 주가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전무도 서운했지만

입 꾹 닫

인사하고 나온 이유는

그렇게 해야

남은 날 다른 기회를 위해

인맥이라도 남겨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라 하더라.




그러면서 오히려

울먹이며 분통해하는 날

진정시키던 사모.




지금 방금 소식을 접해

방방 뛰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조금은

생각과 마음이

정리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날 진정시키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때,

최차장이

다른 계열사로 옮기기 직전에

회식에서 취해가지고

했다는 말 기억나?

거기 있는 사람들한테

내가

순순히 나갈 거 같냐면서

한 방 먹이고 나간다 말했다고

ㅇㅇ씨가 알려줬었잖아.

그땐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거였어..."




맞다.

사모를 통해 들은 적 있었다.




그땐 속으로

제까짓 게 뭘 어쩌겠다는 건가

했더랬는데

이 짓거리를

꾸미고 있었던 거다.




최차장이 이동을 한 게

추워지기 전이었으니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뜻인 거지.




사모는

그래도 그 인간들은

그럴 놈들이었다며

지금 가장 충격인 건

새로 발령받아 나온 대리가

그 무리에 껴 있었던 거라

말했다.




그 대리직원의 부인과도

좋게 지내고 있던 차였으니

오죽하겠나.




"블래스미,

내가 느낀 게 뭔지 알아?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는 거야.

날 해치려 드는 사람은

한눈에 보이겠지만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 속은

당하기 전까지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심하고

앞으로 살면서

절대 아무도 믿어선 안 돼.

절대로 아무도 믿지 마...!

알았지!!"




그렇게

사모를 위로하는 듯,

나를 위로하는 듯한 통화는

5시간 만에 종료됐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해서 아이들을 픽업하고

저녁밥을 차렸는지

지금도 그 순간은

머릿속에 없네.




머릿속엔

온통 남편 생각뿐이었다.




사실

사모와 통화하는 와중에도

빨리 끊고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이것만큼 심각한 일은

우리에게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모와 5시간을 통화하는 동안

내 생각은 바뀌었다.




지금 당장 말고

주말에 말하는 걸로 말이다.




일단 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전달을 해야

충격이 덜 할지를

생각하고 말이다.




이유는

역시나 이것만큼

우리에게 심각한 일은

없어서이기 때문이지.




전무의 해임을 알게 된 게

수요일이었는데

내가 바로 이야기를 한다면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목요일과 금요일을

제정신으로

보낼 수 없을 것이고

업무를 볼 수 없을게

뻔할 거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큰 변고를 맞았는데

이 충격으로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 건

최소한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최선을 다해 행동했지만

사실 난

정신 나간 사람이었던 거 같다.




밥을

입 안으로

집어넣긴 했지만

먹었다 할 수 없는 상태였고

티비 앞에 앉아는 있지만

내 눈과 귀는

살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한 숨은 또 얼마나 나오던지.




내가

내쉬려 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정말 속이 답답하고

터질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숨 쉬듯 나오던 한숨.




그렇게 이틀 밤을 보냈다.

밤새 뒤척이며

한숨도 자질 못했던 난

그 사이에 백 살은 먹은 듯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몸살에 걸린 느낌도 들더라.




금요일 아침,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서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을 감고 누워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답 없는 이 생각만

계속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누구와도

떠들고 싶지 않았기에

사모의 전화라면

받지 않으려 했는데

확인해 보니

남편이 건 전화네.




받기 전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불속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던 나는

한낮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




"지금 집이야?

혹시 전무 얘기 들은 거 있어??"




남편은

내가 받자마자

상기된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그 순간 알았더랬지.

아,

이 남자가

전무 소식을 알아버렸구나...




"아.. 어...

사모랑 통화했어.

이따 집에 오면 말해줄게"




더 긴 말을 해 주고 싶지만

회사에서

그걸 듣게 할 일이 아니었고

전화로 들을 일이 아니라는 걸

남편도 알았기에

더 이상 질문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지라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된 상태였지만

주말에 공개하려던 계획이

무너진 게

안절부절이었네.




그만큼

남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이른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들어와 선 자리에

가방을 툭 내려놓았고

말없이 나만 처다 보았는데

그 얼굴은

정말 시커멓게 흑빛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 건지

오늘 아침에 알았다는 걸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볼이 홀쭉하고

입술이 메말라 있더라.




"한숨만 나오고

도저히

회사에 못 있겠어서 나왔어.

말해 봐."




아이들이

거실에 있던 상황이었고

나도

내가 얼마나

차분하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 없어서

남편을 데리고

2층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나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사모와 했던

5시간의 통화 내용을

모두 말해줬지.




그러면서

그동안

의문 투성이었던 퍼즐

맞춰 보여 줬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남편의 눈빛은

강렬하게 깨어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무표정으로 듣고만 있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




전해 들은 이야기들과

앞 뒤가 맞춰지는 이야기들을

끝내고 나니

내 속에 끙끙 앓았던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이틀을 한 달처럼 보내면서

그 큰 충격을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삼켜 대기만 했더니

그 새 속이 곪았던 건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나는 생각을 할수록

내 탓인 거 같았다.




사모가

새로 나타난 빌런들과

부딪히고 있을 때

내가 신경 끄라고,

무시하라고 말렸어야 했다.




아니면 그것 보다 먼저,

내가 사모와 당한

그 맥도날드 대첩을

그냥 묻고

원수 같던 J를 품었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그 맥도날드 대첩이

일어나지 않도

내가 S의 연락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과

안면을 트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애초에,

사모와

친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이라도 바로 잡고 싶은

후회의 순간들을

되짚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말하며

오열을 했더랬지.




남편은 아니라며,

그런 건 다 됐다며

나를 토닥였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

선택의 칼자루를 넘겨줬다.




"난 이제 모르겠어.

이렇게 되면

애들도 당신도

돌아가는 게 좋을지

남는 게 좋을지..

뭐가 맞는지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이제 정말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일이 벌어진 그때는

우리의 복귀가

예정된 시점으로부터

7개월 전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인사팀이 개입되어 있다거나

오피셜 하게 공지가 뜨거나

서류가 오간 게 아니었던 거지.




오로지

전무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가 된 거다.




그래서 우리에겐

선택을 번복할 기회가

남아 있는 상황.




원점으로 돌아간 건

또 하나 있었지.




전무가 계획하고 제안을 했던

그 모든 것들 말이다.




달콤한 약속을 건넨 장본인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이 있을까?




내쫓기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전무가

우리의 왕관을

누군가에게 맞겨놨을 리도 없다.




그랬다면

다른 경로로 연락이 왔겠지.




그 왕관 나에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와서

찾아가면 된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었고

오히려

우리가 받은 연락은

남편 대신

주재원을 나오기로 했던

그 대체 직원의 연락이었다.




그도

자신의 왕관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우리에게 물었더랬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그 상황 속에서

겨우겨우

정신줄을 잡고 있던 나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내 놓자마자

모든 것이

무장 해제 되다 못해

무너지더라.




나는 모든 것이 후회스러워

오열을 했고

반대로,

쓰러질 듯이 집에 돌아왔던

남편은

이성을 되찾은 듯

비장한 눈빛과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토닥였다.




모든 것이

하룻밤의 꿈이 되어

날아갔던 날

남편과 나는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있었지만

머리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