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블레스미

도대체

몇 시간을 이야기했던 걸까.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조용히 이야기하고자 올라갔던

2층 방 안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그날 바로 결정을 내려 버렸다.




"우리 미국에 남자"




이제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홀홀 단신이 아니기에

식구들의 인생을 걸고

도박하고 싶지 않았고

불확실성에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 건데

그걸 잊고

정복했다는 듯

잠시 자만했던 그 대가가

너무 컸기에

이제는

현제가 보여주는

결괏값으로만

판단하기로 한 거지.




그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은

모든 것이

희망 고문인 셈이었다.




남편이

좋은 팀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어쩌면 좋은 자리로 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도 있다.

좋은 성적으로

입시를 치르게 될 수도 있다.




내 커리어를

다시 이어나갈 수도 있다.

경단녀를 졸업할 수도 있다.




모든 게 불 확실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제부터

노력할 일들만 남은 거지.




하지만

미국에 남는다면

못해도 본전이었다고나 할까.




이미 남편은

미국 직원들 사이에서

경쟁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영주권 서포트는 물론이거니와

현지 채용으로 넘어가면

디렉터 직급으로 승진하게 되니

연봉도 오르게 되는 셈이다.




아이들도

새로운 교육환경에

몸을 구겨 넣을 필요 없고

지금 하던 대로,

익숙한 대로 공부하면

입시 걱정은 없다.




나?




미국에서

밥만 하다 죽고 싶진 않다고

항상 말해왔지만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누가 내 자릴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에

이 나이에, 이 경력단절에

다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쉽진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니 미국에 남는다면

내가 이곳에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밥만 하고 있는 거라며

정신승리라도

가능하지 않겠나.




우리는

신속한 결정을 내렸고

지체 없이

한국 본사와 미국 회사에

통보를 했다.




미국 회사의 윗사람들은

우리의 결정을 반가워하며

고맙다 말하기까지 하더라.




한국 본사에서도

반기는 분위기였다.

인사팀 상무는

괜찮으시겠냐 물으며

경험 많은 남편이

그리 남아주면

회사입장으로서는

너무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네.




문제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지.




당장 몇 개월 후면

코 앞에서 만나게 될 거라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모든 것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뒤집혀 버렸으니 말이다.




말을 떼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누군가는

그렇게 말을 할 것이다.




그러길래

전무가 가족도 아니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인데

뭘 믿고

그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냐고.




뭐가 어찌 될 줄 알고

자리 준다는 그 말에

덥석

큰 결정을 할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우리가 겪은 전무는

그럴 사람이었다.




가족도 못 믿겠다 하는

요즘 세상에

전무는

누가 뭐래도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는 걸

우린 온몸으로 경험했거든.




나나 남편이나

이런 사람은 인생 처음 봤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평할 만큼 말이다.




사실 난 속으로 생각했었다.




전무가 했던 자리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다면

거기엔

딱 2가지 이유만이

있을 거라고.




첫 번째는

일 중독인 전무가

결국엔 쓰러져

더 이상은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경우라 보았고




두 번째는

전무가

회사에서 잘리게 되어

더 이상은

함께 일 할 수 없는 경우라

보았지.




그리고

그 둘 중에 한 가지가

현실로 일어난다면

그건 분명히

첫 번째 경우 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

전무는

병에 걸려 죽을 만큼

일 하는 사람은 맞지만

절대 잘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회사가 미쳤어?

이렇게 멱살 끌고

하드 캐리하고 있는 전무를

자르긴 왜 잘라!




하지만

회사는 미쳤고

전무는 잘렸다.




우리가 남기로 결정을 하자

회사는 바로

신분 변경 절차에 들어갔다.




영주권 신청을 위한

서류 작업을 시작했고

남편은

새로 얻게 될 직급에 맞춰

연봉 협상을 준비하게 되었지.




그리고

주재원 신분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질 혜택들을

정리하느라 바빴고

현지인 신분으로

새롭게 얻게 될 혜택들을

세팅하느라 바빴더랬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에 따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한 편으로는 사실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미련 없이 후련한 마음으로

정착 준비를 했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이번은 누가 뭐래도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직접 내린 결정 아닌가.




우리가

자주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미련들과 걱정거리들이

비집고 나오려 할 때마다

강하게 그 문을 닫아 주더라.




그러면서

나를 믿고,

서로를 믿는 마음이 생기는 걸

느꼈다.




이제

어떤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오롯이

감당해 낼 자신이 생겼달까.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봐 하는

싸움닭 모드에

세상아 덤벼라 식의

깡다구 마인드.




사모가 했던 말이

지금까지도 진하게 남아있다.




"아무도 믿지 마.

절대 아무도 믿어선 안 돼!"




사모는

누가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

경계하라는 뜻으로

나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좀 다르게 들렸거든.




그게 누구였 든 간에

절대

다른 이에게 의지하거나

기대하면 안 돼.




그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의 운명은

철저히 나로부터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야




오로지 나 자신만 믿고

그 안에서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




그러니 아무도 믿지 마.




절대,

너 자신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