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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Dec 04. 2021

<24> 세상에서 가장 ‘잘’ 살다간
사람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네. ‘잘’이란 말을 ‘아름답게’라든가 ‘옳게’라는 말로 바꾸어 놓는다면 어떻겠나?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겠지?”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향연, 파이돈’



대구에 있는 영남고등학교 교훈은 ‘잘 살자’이다. 고교시절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색이 학교 교훈이라면 진리, 정의, 사랑, 희망, 꿈같은 것이라야지 촌스럽게 그게 뭐냐는 생각이었다. 영남고 다니던 친구한테 “그래 공부 열심히 해서 잘 먹고 잘살아”라며 놀리곤 했다.


나이 들면서 이 교훈, 참 좋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철학의 문을 세상에 처음 연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기에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앞에 소개한 문장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릴 때, 친구 크리톤이 새벽에 감옥으로 찾아와 해외 탈출을 권유하자 거부하면서 했던 말이다.


이런 말도 더불어 했다. “친구여, 대중이 우리에 관해 말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정의와 불의에 관한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도 말일세. 진리 자체가 말하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일세.”


소크라테스는 2400년 전에 살다 간 철학자다. 역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겼지만, 세계 최고 문명 도시 아테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는 데다 외모는 볼품이 없었으며, 남에게 자꾸 난처한 질문을 던져 기분 나쁘게 하는 성가신 존재였다. 그러나 엄청난 카리스마와 지성의 소유자임은 누구나 인정했다. 아고라(광장)를 돌아다니며 문답식으로 청년들을 주로 가르쳤다. 


70세에 이른 그가 재판을 받게 된 죄목은 ‘아테네의 신을 무시한 채 자신의 새로운 신을 내세웠으며, 청년들에게 국가 조직에 맞설 것을 부추겼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정치 공안사범인 셈이다. 그의 법정 발언(변명), 탈출 권유(크리톤), 사형집행(파이돈) 등을 현장에 있던 젊은 제자 플라톤 등이 기록했다는 것이 이른바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철학이라 부르는 이유를 새삼 확인할 수도 있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 이유를 길게 조목조목 설명한다. ‘변명’이 그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스스로 물으면서 이렇게 답한다. 


“조금이라도 품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할 일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 일을 하면 살게 되느냐 죽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철학자답게 지혜에 대한 갈구를 전한다.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결코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고하며,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처럼 저의 생각을 전할 것입니다.”


고개 조금 숙이고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면 무죄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고 결과는 유죄(배심원 투표 유죄 280표, 무죄 220표)에다 사형(배심원 투표 사형 360표)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가 떨어지자 이렇게 말한다. 최후 진술인 셈이다. 당당함이 하늘을 찌른다.


“저는 위험에 처해 있다 하여 비굴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의 방식대로 변명한 데 대해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비굴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살아남기보다는, 저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 크리톤의 거듭되는 해외 탈출 권유에 대해 ‘옳음’을 강조한다.


“자네 말을 따라야 할 것인지 검토해 보세. 어느 누구의 말에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내 이성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나의 방식일세. (중략) 남들의 의견은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가지만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크리톤에게 친구들이나 제자들이 추진할 수도 있는 보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특별히 강조한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처럼 악으로써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네. 어떤 경우에도 악을 행해서는 안되니까 말일세."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 한 달쯤 뒤 죽음을 맞이했다. 비통해하는 아내 크산티페를 내보낸 뒤 그곳에 모인 친구들과 철학적인 담론을 나눈다. 대화 주제는 철학자의 죽음, 사후 육체와 영혼의 분리 문제였다. 저녁 무렵 슬퍼하는 친구들을 질책하며 목욕을 끝내고, 세 아들을 면담한 뒤 조용히 독배를 마셨다. 


그는 마지막 순간,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주게.”


지금, 그의 죽는 모습을 칭송하거나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죽음을 숙명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철학자의 모습이 멋있게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래서 가급적, 아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철인의 죽음을 통해 ‘잘’ 사는 법을 깨우칠 수 있다.


‘잘’ 살았으니 멋지게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잘’ 살지 못했다면 결코 멋지게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이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거나, 죄스럽거나, 남에게 큰 피해를 입혔거나, 후회스럽다면 죽음이 얼마나 아쉽겠는가. 아쉬우니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려면 소크라테스처럼 ‘잘’ 살아야 할 텐데, 그가 잘 산다는 의미를 ‘아름답게’와 ‘옳게’라는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아름다운 삶을 생각해 본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에겐 자선 아닐까 싶다. 


그는 청년들을 가르치는데 평생을 보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토론 및 연설 기술을 가르치는 소피스트에게 보내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그런데 학비가 무척 비쌌다고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아무한테나 최고급 강의를 하고도 학비를 받지 않았다. 그는 이 점을 스스로 아름다운 삶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옳은 삶 역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에겐 권력에 굴하지 않고 평생 바른 소리 내는 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공직을 탐하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유일한 공직은 ‘평의회’ 의원이었다 그것도 유일하게 옳은 소리를 해댔기 때문에 잠시 하고 그만둬야 했다. ‘변명’에 나오는 자신의 회고담이다.


“여러분(재판관, 배심원 지칭)은 해전이 끝난 후 열 명의 장군들이 해전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바다로부터 끌어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꺼번에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인정한 것처럼 불법적인 일처리였습니다. 그때 평의원 중에서 여러분에게 반대하여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반대쪽에 투표한 것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누구나 옳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참되게, 바르게, 진실되게, 선하게 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옳게 살아야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는 말은 당연히 일리가 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옳게 사는데도 인생이 고달파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의 이익과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아니 꽤나 많다. 불의를 보고도 슬쩍 눈감으려 한다.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유연성이 떨어진다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마저 있다. 소크라테스가 알면 “240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러고 있냐”라고 혀를 찰 것 같다.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라 불렸던 풀무원 농장 창업자 원경선은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자 이런 내용의 액자를 만들어 사무실에 걸어놓도록 했단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아들은 옳음과 유연성 둘 다 갖고 품격 지키며 5선 의원을 지냈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향연, 파이돈> 플라톤, 박병덕 옮김, 육문사, 2010

<플라톤의 대화편> 플라톤, 최명관 옮김, 창,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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