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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Dec 16. 2021

<25> 양심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라

삶의 어두운 길을 인도하는 고귀하고도 유일한 지팡이

“바다보다도 큰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도 큰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양심)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제1 주제로 흔히 ‘속죄를 통한 인간성 회복’을 꼽는다.


그렇다. 주인공인 전과자 장발장이 도둑질한 죄를 뉘우치고, 불쌍한 여인의 딸을 위해 헌신하는 성자(聖者)의 모습을 그린다. 한 인간의 탈선과 변신, 갈등, 회개, 희생, 결단, 용서, 자선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여기서 나는 ‘양심’이란 단어를 특별하게 떠올린다. 장발장의 삶을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은 결국 양심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양심이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의식을 갖고 산다. 도덕성을 통해 우리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품격을 지키며 행복을 찾아간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비양심적인 사람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감옥에 갈 정도의 범죄 행위를 자행하지 않을 뿐 정신적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이런 사람에게 품격이 있을 리 만무하다.


레미제라블은 인간의 양심이 무엇인지, 인간의 양심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하드라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19세기 프랑스에서 양심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새삼 일깨워준 소설이다.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식하고 가난한 시골뜨기 장발장이 굶어 죽어가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되었지만 전과자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성당에 찾아갔다가 주교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았음에도 그곳 은쟁반을 훔친다. 주교의 용서를 받았으나 길 가던 소년의 동전을 빼앗는 바람에 종신형을 받을 수 있는 누범자가 된다.


스스로 회개한 장발장은 명예 회복에 나서 조그마한 도시에서 공장을 세워 자선과 많은 덕을 베풀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시장이 된다. 집요한 자베르 형사만이 의심을 품고 그를 감시한다. 그러던 중 뜻밖에 다른 한 남자가 누범 전과자 장발장이라며 경찰에 체포돼 종신형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발장은 고심 끝에 무고한 남자를 구하고자 스스로 이웃 도시 재판정을 찾아가 자수해 또다시 영어의 몸이 된다. 그러나 금방 탈옥해, 시장 시절 돌봤으나 죽은 불쌍한 여인의 어린 딸 코제트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해 무한한 사랑을 베풀며 키운다. 


양갓집 청년인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파리 시내 공화파 폭동에 적극 가담한다. 그의 패배와 죽음이 불가피함을 눈치챈 장발장은 폭동 현장을 찾아가 중상을 입고 기절한 마리우스를 어깨에 메고 땅 밑 하수도를 통해 탈출, 자기 집까지 데려다준다.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에 성공해 큰 행복을 찾았으며, 자베르 형사는 자살했기에 장발장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사랑하는 코제트를 떠나 혼자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마리우스는 그가 자신에게 생명의 은인임을 뒤늦게 알고 코제트와 함께 찾아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장발장은 두 젊은이의 사랑과 행복을 당부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앞에 소개한 문장은 장발장이 무고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재판정에 나가기로 결정해 놓고도 고민하는 모습을 작가 위고가 묘사한 대목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남자가 대신 형을 살고, 자기는 자베르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양심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재판정이 있는 도시까지 타고 갈 마차를 예약해 놓은 상황에서 장발장은 밤새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갈등의 저변에는 끊임없이 양심이 꿈틀거린다. 장발장의 심리 묘사다.


“오호라! 내쫓고 싶었던 것이 들어와 있었다. 눈멀게 하고 싶었던 것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양심이. 그의 양심, 즉 신이.”


재판정에서 자백하는 순간 곧바로 체포되고, 죽을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한다. 반면 눈 질끈 감고 모른 체하고 지나가버리면 조금 불안하긴 해도 시장직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또 다른 심리 묘사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심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 몸을 구부리고, 양심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자, 그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제 결심은 섰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자수하고, 그토록 비통한 오류의 희생양이 된 그 사나이를 구출하고, 자기 이름을 밝히고, 의무를 다하여 다시 죄수 장발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자기의 부활을 성취하고 자기가 벗어난 지옥의 문을 영원히 닫아 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재판정으로 가는 길이 끊어지고, 마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자수를 단념하고 되돌아올 기회도 있었지만 장발장은 결국 갔다. 그리고는 충격의 자수를 했다. 


작가는 장발장의 양심을 결론 삼아 이렇게 묘사했다.


“장발장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확실히 하나의 각성한 양심임에 틀림없었다. 거기에는 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명예 회복이 시작되어 있었고, 필시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양심의 가책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올바름과 착함의 발동은 평범한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심의 각성, 그것은 영혼의 위대함이다.”


양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는 게 정상이다. 양심껏 살 때 비로소 도덕적 인간이 된다. 반대로 양심을 버리고 산다는 건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양심이 있고 없음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양심, 양심, 신성한 본능이여. 불편한 하늘의 소리여. 지성 있고 자유로운 존재의 확고한 안내자여. 선악에 대한 올바른 심판자여. 인간을 신과 닮게 하는 자여. 그대야말로 인간 본성의 우수성과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낳게 하는 자다. 만약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오성과 원리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 잘못만을 저지르는 슬픈 특권을 느낄 분이며, 그때 나는 하나의 동물일 따름이다.”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없다면 루소의 말처럼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양심을 자신의 생각과 언행에 제대로 반영하고 표출하느냐 여부다.


양심껏 사는 사람은 스스로 행복하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양심을 좇아 살고자 노력한 장발장은 행복했을 것이다. 양심은 정의와 사랑을 낳는다. 장발장은 양심을 되찾았기에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훈은 ‘언제나 어디서나 양심과 정의와 사랑에 살자’이다. 학창 시절 나는 기독 재단 학교이면서 왜 양심을 사랑보다 앞세웠을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나이 들어서야 양심이 사랑보다 결코 덜 중요한 덕목이 아니며, 양심이 발현돼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올곧게 양심을 지키며 살면 상대적으로 손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양심을 속이며 사는 사람에게 피해볼 수 있다는 의식이다. 그런 생각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나긴 인생길, 멀리 보면 양심은 반드시 승리한다. 인생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기 때문이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에겐 시련이 닥쳤을 때 십중팔구 도움의 손길이 다가온다. 


“인간을 비추는 유일한 등불은 이성이며, 삶의 어두운 길을 인도하는 유일한 지팡이는 양심이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이다. 이성을 갖고 양심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면 품격이 생기고 인생길이 한층 밝아질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대표적으로 양심적인 삶을 살다 간 지식인이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소신을 지키느라 루이 나폴레옹과 치열하게 대립했으며,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이후에는 20여 년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시련기에 그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썼다.  


프랑스인들은 양심적 투사였던 위고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가 83세의 일기로 숨지자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예우했으며,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따랐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민음사, 2012

<노트르담 드 파리>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동서문화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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