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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Dec 22. 2021

<27> 내면이 아름다운 여배우

두 손 가운데 한 손은 남을 위한 손. 남을 도우면 내가 더 행복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달린 손을 이용해라.

네가 더 나이를 먹는다면,

너의 손이 두 개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남을 위한 손이다.”


-전기작가 알렉산더 워커의 ‘아름다운 인생 오드리 헵번’



영화 ‘로마의 휴일’과 ‘티파니에서 아침을’ 주연 배우로 유명한 오드리 헵번(1929-1993)은 20세기 미인의 상징이다. 1950-6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으며, 온갖 유행을 창조하는 대중문화 아이콘이었다. 


한동안 그가 ‘만인의 연인’이라 불린 이유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유엔 어린이 구호단체인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자선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최빈국들을 찾아다니며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피는 모습에 전 세계인들이 박수를 보낸 것이다. 참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앞에 소개한 문장은 헵번이 특별히 좋아했던 샘 레벤슨의 시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일부다. 헵번은 죽기 꼭 한 달 전인 1992년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아들 숀 페러에게 이 말을 전했다. 자기 나이 63세, 아들 나이 32세 때였다. 결장암이 죽음을 재촉하고 있을 즈음 병상에서 되뇌었으니 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 시 앞부분을 마저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매혹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과 나눠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아이의 손으로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네가 결코 혼자 걷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면서 걸어라.”


헵번은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홀연히 집을 나가는 바람에 홀어머니 손에 자랐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발레리나를 꿈꾸며 무용학원에 다녔으나 모델을 거쳐 영화배우가 되었다.


 24세 때 출연한 로맨스 영화 ‘로마의 휴일’은 헵번을 단숨에 할리우스 스타로 만들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이후 에미상, 그래미 어워드, 토니상까지 받아 초특급 배우로 등극했다. 


영국 국적의 아버지, 네덜란드 출신 어머니를 둔 헵번은 벨기에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덕분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에 능숙했으며, 스페인어도 조금 할 수 있었다. 이는 연기나 인터뷰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두 번 결혼해서 두 번 이혼했다. 사랑에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고,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두 남편에게서 하나씩 얻은 두 아들을 바쁜 와중에도 정성 들여 키웠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영화계 생활을 즐기면서도 ‘정숙함’을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한 이유다. 특히 키스신과 베드신을 신중히 하려 했다.


전기작가 알렉산더 워커는 히치콕 감독이 영화 ‘노 베일 포 더 저지’을 제작할 때 접한 헵번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사실 히치콕 감독은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배우들을 크게 아끼지도 않았으며, 여배우들은 특히 주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드리(헵번)를 캐스팅하면서 그는 외모와 예의 면에서 교양 있는 여성, 할리우드식으로 표현하면 ‘상류계급’에 속하는 오드리에게 완전히 매혹당했다. 오드리의 예절 바른 겉모습 안에는 관능적인 부분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헵번은 배우의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는 당당함도 겸비했다. 그것이 품격이라 생각한 듯하다. 역시 워커의 묘사다.


“이때(1951년)부터 죽을 때까지 오드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단호하게 공과 사를 가렸다.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홍보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양심적으로 그 의무를 인정했다. 그러나 영화 이외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자기 방식대로 살았고 자신의 삶을 침해하는 호기심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으며, 영화를 찍지 않는 동안에는 기자들에게 가능한 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헵번은 1970년대부터 활동을 줄이다 88년 은퇴했다. 59세 때다. 그녀는 곧바로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어 자선 봉사활동에 나섰다. 1년에 1달러 이외에 어떤 보수도 받지 못하는 자리였으며, 대부분의 활동 비용은 자기 지갑에서 꺼내야 했다.


그녀는 지명도가 아주 높았기에 제3세계 구호 여행과 선진국에서의 후원 활동은 유니세프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헵번은 4년여 동안 최빈국, 혹은 재난 지역을 50회 이상 다녀왔으며, 다녀오자마자 북미와 유럽지역을 돌며 후원 약정을 받아냈다.


헵번의 열정적인 봉사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영감을 주었다. 스타 유명인들에게 칭송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그레고리 펙의 멋진 회상이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공주가 마침내 여왕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연예인들의 국내외 봉사활동과 자선이 줄을 잇고 있다. 돈과 명성의 크기에 상관없이 가히 경쟁적으로 시간과 물질을 내놓고 있다. 김혜자, 안성기, 션과 정혜영 부부, 차인표와 신애라 부부, 김혜수, 이보영, 원빈은 특히 눈에 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들의 활동은 일반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봉사와 자선은 남을 사랑하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 하지만 남을 사랑하지 않는 행복은 사상누각이다. 그 행복, 언제 뿌리 뽑힐지 모른다. 그럴진대 봉사와 자선을 영영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실천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자신의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일까. 그럴 리는 없다. 왜 그럴까. 실천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선뜻 내놓기 어려운 귀한 소유물이다.


오드리 헵번에게 돌아가 보자. 은퇴한 그녀에겐 당연히 최고의 안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위스에 마련한 집은 천상의 주거지였다. 고급 저택에서 멀리 알프스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넓은 정원을 거닐며 여유를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비록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자기한테 정성을 다하는 연인도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험하고 힘든 길을 택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지를 거침없이 다니며 기아와 전쟁으로 지친 아이들을 껴안고 사랑의 눈길을 전했다. 그리곤 선진 각국을 돌며 후원 행사를 가졌다. 아이들을 만나서도 함께 울고, 기부자들을 만나서도 함께 울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녀 마음은 평안하지 않았을까. 지친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자신은 큰 행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 봉사와 자선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일찍이 레프 톨스토이가 가르쳐준 진리다. “삶은 봉사의 현장이다. 봉사하는 삶은 힘들지만 얻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 제러미 벤담과 달라이라마도 비슷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기쁨에 비례해서 자신의 기쁨이 쌓인다.” “남을 도울 때 가장 덕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필자는 봉사와 자선에 영 자신이 없다. 국제 구호기구 한 군데 매월 소액 기부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코로나 탓에 밖으로 나다닐 일이 적다 보니 길거리 노숙자에게 동전 한 닢 건넬 기회조차 없다. 헵번이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당신의 두 손 가운데 한 손은 무조건 도움받을 사람들을 위해 쓰세요. 핑계 대지 말고, 지금 당장 도움의 손길을 내미세요.”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아름다운 인생 오드리 헵번> 알렉산더 워커, 김봉준 옮김, 달과소, 2005

<오드리 헵번> 마틴 지틀린, 양선영 옮김, 신원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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