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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Dec 24. 2021

<28> 물처럼 부드럽게 사는 인생

노자, 싸우지 않고도 이기고 삶을 혁신할 수 있는 비법을 전하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만 할 뿐 다투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최진석의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에 ‘수석’이란 대중 음식점이 있다. 한식집인데 꽤 정갈하면서도 푸짐하게 상을 차려주기에 가끔 들르곤 했었다. 간판을 한자로 ‘水石’이라 하고, 작은 글씨로 ‘물처럼 돌처럼’이란 부제를 달았다. 


이 간판 처음 본 날, 내 가슴이 얼마나 출렁였는지 모른다. 왠지 마음에 딱 와닿아서다. 나는 의미를 보강해 ‘물처럼 부드럽게, 돌처럼 단단하게’란 문장을 떠올려보았다. 외유내강이란 뜻이겠다. 내심 아호를 ‘수석’이라 정해 보기도 했다.


물과 돌은 서로 비교되는, 아니 정반대 되는 이미지다. 물은 부드러움, 약함, 곡선, 여자, 흐름, 여유, 양보, 느림, 타협, 친화력 등을 연상케 한다. 돌은 단단함, 강함, 직선, 남자, 고정, 원칙, 고집, 빠름, 추진력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게 아마 편할 것이다. 한 가지에 지나치게 치우칠 경우 세상과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외유내강이 비교적 바람직한 유형의 품성으로 간주되는 이유 아닐까 싶다. 남에게 부담 주지 않으면서 자기 실속을 챙길 수도 있는 사람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물을 택할 것이다. 돌 같은 사람보다 물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더 환영받을 것 같고, 나 자신이 마음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경쟁이 불가피한 우리 사회에서 물과 돌이 맞붙으면 결국 물이 이길 것이란 생각도 든다.


다행히 2500년 전 중국에서 살다 간 대사상가 노자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물을 크게 칭송했다. 앞에 소개한 글은 그의 유일한 저서 ‘도덕경’ 제8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물과 같은 이런 덕을 가진 사람은 살아가면서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씀씀이는 깊고도 깊으며, 베풀어줄 때는 천도처럼 하기를 잘하고, 말 씀씀이는 신실함이 넘친다. 정치를 한다면 질서 있게 잘하고, 일을 할 때는 능력에 잘 맞추며, 거동할 때는 때를 잘 살핀다. 오로지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구나.”


노자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사상적으로 그와 곧잘 비교되는 공자는 실존이 분명한 사람이지만 노자는 실존 자체가 불분명하다. 전래 설화와 사마천이 쓴 사기 등 옛 기록으로 실존을 추정할 뿐이다. 노자는 공자와 비슷한 시기, 혹은 약간 빠른 시기에 살았으며, 소를 타고 허난성 관문인 함곡관 밖으로 나간 뒤 종적이 묘연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관문 밖으로 나가면서 문지기에게 5000자로 된 책을 전했다는데, 그것이 도덕경이란다. 총 81개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의 요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무위자연이란 뭔가를 무리해서 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착실하게 행하라는 메시지다. 흔히 말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물러나서 쉬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잘못된 해석이다.


무위자연의 중심 개념이 물 같은 삶 아닐까 생각된다. 물의 성질을 살펴보자. 우선 물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한다. 높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겸손의 상징이다. 또 물은 다른 것과 부딪치면 곧바로 피해서 돌아간다. 절대 싸우는 법이 없고 화평을 도모한다. 물은 또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끌고 내려간다. 자기 몸 더럽혀가며 주변을 정화한다. 한없는 포용력이다.


그렇다. 겸손, 화평, 포용력이 물의 특장이다. 이는 부드러움에서 비롯된다. 물이 부드럽다고 약하다 할 수 있겠는가. 돌처럼 단단하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경쟁력이 결코 돌에 밀리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과 부드러움의 강점을 여러 번 설파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들을 교화하려 들면 안 된다.”(제36장)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을 부린다. 형태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런 이치로 무위가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안다.”(제43장)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지만 죽으면 뻣뻣해진다. 만물 초목도 살아 있으면 유연하지만 죽으면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뻣뻣한 것은 죽어 있는 무리이고 부드러운 것은 살아 있는 무리이다. 강대한 것은 하위에 처하고 유약한 것이 상위에 처한다.”(제76장)


“세상에서 물이 가장 유약하지만 공력이 아무리 굳세고 강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런 이치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제78장)


작고한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 당시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물태우’라 불린 적이 있다. 민주화가 진전돼 노동조합 조직과 학생 운동이 활성화되는 과정에 각종 시위가 잦았지만 공권력 대응을 자제한 데 따른 보수세력의 비판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런 비판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국민들이 직전 전두환 대통령, 더 멀리 박정희 대통령의 강성 드라이브에 익숙한 나머지 느슨해진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참고 기다리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발휘했고, 그 결과 민주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정국이 안정됐기에 북방외교에 큰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물만큼은 아니라도 풀도 부드러운 속성을 갖고 있다. 큰 나무 그늘에 가려 햇볕을 보지 못해도 불평이 없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지만 말없이 금방 일어선다. 김수영의 시 ‘풀’이 이를 잘 묘사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세상을 살면서 부드러움은 단단함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다. 아니 더 좋다. 품성이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향기가 난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말을 골라서 적게 하고, 고개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이런 사람에겐 품격이 느껴진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강하지 않아도 카리스마를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권력이 없어도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부드러운 사람이 칭송받는다. 부모가 자녀에게 막무가내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온전히 사랑을 베풀 때 가정이 행복해진다. 직장에선 부드러운 이미지의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부드러운 성향의 상급자 라야 하급자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는다. 물 아빠, 물 부장이란 소리 들어도 괜찮다. 원칙과 중심만 잘 지키면 된다.


노자는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곳에 이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도덕경 제8장에 나온 그대로다. 동양철학자 최진석은 이런 물의 속성에서 혁신과 창조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자의 눈에 비친 물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는 물의 특성이 바로 그것이에요.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있는 시스템 안에 끼어들기보다는 아무도 가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자신의 선택지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차지한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상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바로 그곳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그곳은 누구도 먼저 차지하려고 덤비는 곳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차지하려고 덤비지 않는 이상한 곳, 거기에서 혁신의 씨앗이 남몰래 자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블루오션’을 노자가 말한 셈이다. 경쟁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아남고자 ‘레드오션’에서 피 튀기는 삶을 영위하기보다 경쟁이 아예 없는 넓고 푸른 바다로 나가는 게 정답이란 사실을 노자가 간파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물이 가장 훌륭하고 탁월하다는 주장은 그래서 옳다는 생각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나 홀로 도덕경> 최진석, 시공사, 2021

<도덕경> 노자, 오강남 옮김, 현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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