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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an 04. 2023

<1> 의학도가 혁명가로 변신한 이유

-체 게바라의 종횡무진 라틴 아메리카 여행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는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불린다.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무한한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원칙에 철저하면서도 더없이 유연했고, 머리는 차갑되 가슴은 뜨거웠다. 이념을 초월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이유다. 


게바라를 혁명가로 만든 것은 여행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 졸업을 1년 앞둔 1951년 12월, 그는 8개월간의 라틴 아메리카 여행길에 오른다. 동행자는 의사자격증을 막 취득한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중고 전동자전거(모터사이클) ‘포데로사’가 전부였다. 


아르헨티나를 떠나 안데스 산맥을 넘고 태평양 연안을 질주하는가 하면 광활한 사막을 가로질러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탐방한 후 미국 마이애미를 거쳐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여행 중에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뿌리 깊은 식민지 역사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새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4세 청년은 여행 끝에 인생 설계도를 다시 그리게 된다. 첫머리에 소개한 글은 여행 후 자신이 크게 변했음을 확인하는 말로, 여행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도입부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고치는 혁명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다.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에 있는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스페인 계로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운동을 좋아했던 게바라는 나름 열심히 의학을 공부했으나 탐구심에서 비롯된 특별한 해외여행으로 인생행로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여행 출발 당시의 게바라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아주 특별한 청년은 아니었다. 어수룩하고 괴짜 같은 행동을 해 웃음을 자아냈다. 긴 여행을 앞두고 기분이 설레고 뭔가 이색적인 경험을 고대하는 보통의 청년이었다. 여행기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앞날을 그려보았다. 더 자유롭고 상쾌한 공기와 모험의 기운을 들이쉬고 있는 듯했다. 머나먼 나라들, 영웅적인 행동, 아름다운 여인들이 우리의 어지러운 상상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여행길은 처음부터 고난이었다. 낯선 경찰서와 소개받은 병원에서 주로 숙식을 해결한다는 생각이었지만 퇴짜 당하기 일쑤였다. 배고픔과 비바람, 추위, 모기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고 각종 안전사고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게바라는 가난과 힘겹게 싸우는 민중들의 모습에서 계급제도라는 부조리한 이념을 똑똑히 보았다. 칠레에서 직장 잃은 여자 천식환자를 돌보면서 세상의 변화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당시 생각이다.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가난한 가족의 성원들은 가까스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감추고 살아간다. 그들은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지 못하고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부정적인 요소로만 존재한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한 명이 환자가 되면 그는 부양해야 되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게바라는 한밤중에 길을 걷다 공산주의에 물든 노동자 부부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황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가던 부부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추위로 마비된 몸을 포개 황량한 밤을 보내던 부부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살아있는 표본 같았다. 그들은 누더기 담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담요 한 장을 그들에게 내주고 나머지 한 장으로 알베르토와 함께 최대한 꽁꽁 덮어써야 했다. 그날 밤은 내 생애 가장 추웠던 밤들 중 하루인 동시에 어쨌든 내게는 생소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해 준 밤이었다.”


희미하지만 공산 혁명의 불가피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집산주의, 이른바 ‘공산주의라는 기생충’이 삶을 황폐하게 하는 위험한 것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공산주의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자연스러운 동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끝날 줄 모르는 배고픔에 대한 저항이 공산주의라는 생소한 교리에 대한 사랑으로 전화된 것이다."


게바라는 뒤이어 구리 광산이 있는 추키카마타를 찾아갔다 충격을 받는다.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 광산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거대한 태양의 사원이었지만 유럽 정복자들이 밀고 들어온 후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거대한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노동자들이 빈곤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페루를 방문해 옛 잉카제국 도시유적인 마추픽추에 올라서는 그 장엄함에 감탄하면서도 스페인 침략자들의 무자비한 약탈에 적개심을 느낀다.


“고통에 신음하던 인디오들은 신들의 처절한 복수를 고대했지만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며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살릴 가능성마저 지워져 가는 현실을 목도했을 뿐이다.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식민지 궁전 토대로 쓸만하다고 여겼던 잉카 왕궁의 6미터 높이 벽들은 그 완벽한 석재 구조물 속에 패퇴한 전사들의 통곡만을 담고 있다.”


페루에선 나환자촌을 찾아 의사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나환자들은 자신들을 정성껏 치료해줄 뿐만 아니라 편견 없는 마음으로 형제애를 발휘하고 축구를 함께하는 게바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건너가서는 내전 후유증에 신음하는 민중들의 어려움을 목격한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는 빈민들이 사는 오두막집을 살펴보았다. 


“그 집은 하나의 방을 칸막이로 나누어 둘로 쓰고 있었는데, 한쪽에는 불을 피우는 장소와 탁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침대로 쓰이는 짚이 깔려 있었다. 여러 마리의 고양이와 지저분한 개 한 마리가 벌거벗은 흑인 아이들 셋과 놀고 있었다. 불 피울 때 나는 매운 연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게바라는 여행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나중에는 이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나는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의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1953년 의사시험에 합격한 게바라는 두 번째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떠난다. 이후 수년에 걸쳐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파나마,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멕시코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각국에서 모여든 망명자, 혁명 동지들을 규합하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이던 1954년 그는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마음만 먹으면 과테말라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병원을 차려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병원을 차린다면 말이죠. 이곳엔 코맹맹이 환자들이 많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속에서 싸우는 두 명의 나, 사회개혁가와 여행자 모두를 배신하는 끔찍한 일일 겁니다.”


게바라의 파란만장한 운명은 1955년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면서 결정되었다. 쿠바 공산혁명 계획을 갖고 있던 카스트로에게 동참 의사를 밝혔고, 카스트로는 흔쾌히 수락했다. 1956~59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쿠바 침투 작전에서 게바라는 총사령관을 맡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가 남의 나라 혁명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남다른 포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며,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 간 혼혈인)들이 함께 사는 ‘라틴 아메리카 연방’ 건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31세 나이에 쿠바 혁명에 성공한 게바라는 전권대사, 국가토지개혁위원장,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아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가 하면, 사회주의 수출(?)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소련의 대외정책에 실망한 나머지 돌연 쿠바를 떠나 국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아프리카 콩고로 향했다. 1965년의 일이다.


게바라는 콩고 혁명이 난관에 직면하자 이듬해 볼리비아로 이동했다. 라틴 아메리카 심장부에 사회주의 혁명 기지를 건설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67년 정부군에 체포된 게바라는 “지금의 실패는 결코 혁명의 종말이 아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정치 이념에 따라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뚜렷한 소신에 따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참으로 멋지게 살다 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다 세계인들을 향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 


게바라가 학창 시절 라틴 아메리카를 종횡무진 여행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삶을 개척할 수 있었을까? 유능한 알레르기 전문의사가 되어 사회에 제법 기여하는 인생을 영위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젊은 날의 여행은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넓고도 새로운 세상과 호흡하다 보면 새삼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참다운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게바라가 남긴 말이다.


“청춘은 여행이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것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홍민표 옮김, 황매, 2007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 박지민 옮김, 황매, 2009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를 가다> 강태오, 마루,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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