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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an 09. 2023

<2> 귀족 여성의 우아한 삶을 끝내 뿌리치다

-나이팅게일의 대륙 그랜드투어

“신의 종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귀족 사회의 사교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싶다는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나는 우아한 거실에 머물면서 일생을 보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일을 하기 위해 전진할 것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17세 되던 해, 갑자기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신의 계시를 따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느님이 때가 되면 저를 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훗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간호사라고 확신합니다. 런던으로 가 솔즈베리 병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겠습니다.”


귀족으로 상당한 명성과 재력을 갖추고 살던 부모는 충격에 빠졌다. 요즘으로 치면 과민 반응이라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빅토리아 시대가 막 열린 당시 영국의 명문가 여성들에게는 집안 좋고 부유한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훌륭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최고의 성공으로 여겨졌다.


간호사가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 가문의 수치였다.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더럽고 비천한 직업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처녀들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택하는 직업이라, 귀족 여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이었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있던 딸이 이런 일을 하겠다니 부모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딸과 갈등을 겪던 부모는 가족여행으로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대륙을 장기간 여행하는 ‘그랜드투어’를 통해 나이팅게일에게 드넓은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관심을 딴 방향으로 돌려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그랜드투어는 자녀들에게 대륙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상류층 가정의 인기 여행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이들은 1837년 말부터 1년 반 동안 프랑스의 파리와 니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스위스 제네바 등을 두루 여행했다. 나이팅게일은 부모가 3년간의 장기 신혼여행 중 자신을 낳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머물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부모 기대와 달리 대륙 여행 중 간호사가 되겠다는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사귄 살롱 여주인 메리 클라크 몰과 이탈리아에서 만난 경제학자 장 샤를 시스몽디를 통해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진출과 자기실현에 오히려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영국 출신 여성 작가인 메리 몰은 파리에서 고급 살롱을 운영하며 프랑스 지식인, 문화예술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살롱 문화가 만개해 있었다. 자신의 고급 저택으로 저명인사들을 초대해 식사와 토론을 함께하는 공론의 장을 말하는데, 파리에만 1000개가량 운영되고 있었다. 살롱은 기본적으로 저택의 안주인, 즉 여성이 주도했다.


나이팅게일은 메리 몰을 통해 페미니즘의 가치관을 처음 접하게 된다. 여성은 가정에서 남편을 도우며 육아에 집중해야 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비록 남성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지만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학자 시스몽디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데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삶과 철학은 귀족사회의 일상에 물든 나이팅게일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었다. 매사 우아함을 추구하고 소극적인 삶에 만족하는 귀족 여성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글은 긴 대륙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파리에서 작성한 일기에 나오는 말이다. 그동안의 고민과 심적 갈등, 앞으로의 다짐이 진솔하게 드러나있다. 나이팅게일은 여행을 다녀온 뒤 곧바로 간호사의 길을 걸으려 했지만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여행 기간 중 아버지의 남부 햄프셔 엠블리 별장은 리모델링을 해 화려한 대저택으로 변신해 있었다. 귀족과 상류층 사람들이 오가는 사교의 장이 쉼 없이 펼쳐졌지만 나이팅게일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 무렵 나이팅게일에게 호감을 갖고 청혼하는 남성이 여럿 나타났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데다 지적이고 도도한 매력까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도 결혼할 남성을 만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배려했으나 관심 밖이었다. 시인이자 요크셔 장원 상속자인 리처드 밀네스와는 꽤 구체적인 혼담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이 일기에 밝힌 청혼 거절 이유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내가 만족스럽고 좋다. 과거 내 삶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아름답고 뜻깊은 내 삶의 목표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로 사는 삶을 포기할 수 있다.”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 생각하는 나이팅게일에게 주변의 결혼 압박이 계속되자 우울증이 찾아왔다. 한때 부모를 떠나 멀리 런던의 고모 댁에 거주한 이유다. 나이팅게일은 결국 독신의 삶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모든 가족이 충격에 빠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해봤지만 딸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이팅게일이 부모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간호사가 되려는 결심을 최종적으로 굳힌 것은 30세 때다. 영국의 의학 개혁가이자 예술가, 작가인 셀리나 브리지 부부와 함께 한 그리스, 이집트 여행이 그것이다. 여행은 1849년 11월부터 약 5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나이팅게일은 이집트 여행 중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이 병원 역시 시설과 환경이 엉망이란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쥐와 해충이 들끓는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12년 전에 받은 신의 계시를 이제 겸허히 수용하고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병든 사람이 제대로 치료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보건의료 체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고, 병원의 간호 시스템과 간호 교육체제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여행이었다고 나이팅게일은 회고했다.   


여행을 끝내고 귀국해 집에 잠시 들른 그는 간호 교육을 받기 위해 곧바로 독일로 향했다. 나이팅게일이 찾아간 곳은 루터교 소속 카이저스베르트 수도원. 수도원은 의학 전문지식을 갖추고 인도주의 치료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의료인 교육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간호 교육에 관한 한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나이팅게일이 3개월의 도제식 교육을 받아 정식 간호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앓아누웠고, 언니는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나이 서른을 넘기고, 결혼까지 단념한 나이팅게일에게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었다. 런던의 여성병원에 적을 두고 일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발생한 콜레라 진화에 온몸을 바쳐 일했다. 그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러시아와 유럽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크림전쟁(1853.10~1856.2). 연합국으로 참전한 영국군 야전병원의 참상을 뉴스로 전해 들은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 원정단을 구성해 콘스탄티노플로 날아갔다.


 그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매일 밤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며 부상병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했을 뿐만 아니라, 군 병원의 위생 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전선의 사망자 수를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군 수뇌부를 설득하는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종전 후 빅토리아 여왕의 주선으로 군 의료개혁에 앞장섰다.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간호사가 아니었다. 통계학에 정통한 병원 경영자로서 새로운 의료체계 구축에 앞장섰으며,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닦았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 간호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사회 개혁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이팅게일에게 만약 여행이 없었다면 ‘역사적인 위인’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간호사가 되려는 꿈을 진작에 접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괜찮은 남성을 만나 결혼해서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로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모 손에 이끌려서, 또는 자기 주도적으로 대륙 여행을 다님으로써 한없이 넓은 세상을 체험했다. 여행을 통해 누가 뭐래도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 귀족 가문의 전통적 굴레에서 벗어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봐야겠다. 그토록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고 끝내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행의 힘이라 여겨진다.  


자아실현의 기초를 다진 것도 여행이었다. 그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방문할 무렵에는 이미 의료 현장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쌓은 상태였다. 단순히 간호사가 아니라 의료시스템 개혁가의 자질을 갖추게 한 것도 바로 여행이었다. 나이팅게일은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러면 세상이 너를 반겨줄 것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평전> 김창희, 맑은샘, 2019

<나이팅게일의 모두의 등불>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키와 블란츠 옮김, 이다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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