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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an 13. 2023

<3> 남성 중심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다

-나혜석의 여성 최초 세계일주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모든 물정이 여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작은 것이 값있는 것으로 보고 싶고, 나뿐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알았으면 싶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여성 동경유학생,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나혜석(1896~1948). 


그녀는 자유분방했고, 열정이 넘쳐났으며, 불꽃같은 예술혼을 소유했던 여성이다. 비록 남편과 함께한 것이지만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을 한 것도 이런 남다른 성정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모두에 소개한 글은 세계일주 몇 년 뒤인 1932년, 교양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수필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에 나오는 표현이다. 여행 중 미술을 공부하며 파리에 머물 때의 깨달음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여성이 남성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임에도 한낱 남성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20세기 초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파리와 런던에서 여권 운동가들을 만나 많은 것을 깨우쳤다.


나혜석은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소리 높여 부르짖은 대표적 신여성이다. 화가에 머물지 않고 문필가로서 여성의 권익신장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때여서 욕을 많이 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경기도 수원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신식 공부를 했다. 서울 진명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예술적 자질이 뛰어난 데다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미모가 수려해 주변엔 뭇 남성들이 모여들었다. 


이른 나이에 첫사랑으로 시인이던 최승구를 만났으나 얼마 안 가 그의 폐병으로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 했다. 결혼에 이른 사람은 변호사로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영. 나혜석은 상식적으로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결혼 조건 네 가지를 내세웠으나 김우성은 6년을 애타게 따라다녔기에 별말 없이 수용한다.


“첫째 영원히 나를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넷째 첫사랑 최승구의 묘에 비석을 세워줄 것.”


나혜석과 김우영은 신혼여행 가는 길에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 둘의 이런 별난 행태에 주변의 손가락질이 적지 않았지만 나혜석은 외교관 부인으로, 그림 그리는 여성으로, 아이 셋 키우는 엄마로 비교적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려나갔다. 부부가 세계일주 여행에 나선 것은 이 무렵이다. 김우영이 외무성에서 포상휴가를 얻어 장기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자 따라나선 것이다.


젊은 여성이 어린 자녀들을 남겨 둔 채 무리하게 세계일주에 나선 것은 남다른 철학적, 예술가적 고민에 하루빨리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단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남녀는 어떻게 해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으며, 여자의 지위는 어떠해야 하며, 나의 그림은 과연 어디까지 왔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화단(畵壇)과 유럽 여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살펴보는 게 목표였다.


여행은 31세 때인 1927년 6월 열차로 부산을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단둥, 창춘, 하얼빈) 러시아(시베리아, 모스크바) 폴란드(바르샤바) 프랑스(파리) 스위스(제네바, 베른) 벨기에(브뤼셀) 네덜란드(암스테르담, 헤이그) 독일(베를린) 이탈리아(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영국(런던) 스페인(마드리드, 톨레도) 미국(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일본(요코하마) 등지를 거치는 일정이었다. 배편으로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29년 3월.


나혜석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를 감상하고는 조선일보 최은희 기자에게 이런 내용의 엽서를 써 보냈다. “지평선이 푸른 하늘과 닿은듯한 황무지에는 은방울꽃이 반짝이고 양떼와 소떼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그윽한 이 한 폭의 그림은 네가 항상 말하던 집터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서 모든 벗들과 한잔의 술을 나누고 춤이나 추어보았으면…” 모처럼 가정사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 여성의 들뜬 모습이다. 


나혜석의 여행기에는 파리에서의 추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곳에 오래 머물기도 했지만 이색적인 생활상에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법학을 공부하겠다며 베를린에 가 있는 동안 따라가지 않고 반식민 평화주의자인 펠리시엥 샬레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프랑스 여성들의 실용적인 면모를 들여다본다. “대부분의 파리 여자들은 값싼 천으로 의복을 지어 입는데, 그 묘한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집 딸들도 일요일에는 마룻바닥에 의복 감을 펴놓고 외투를 짓는다든지 모자를 만든다. 지어 입고 나서면 어느 상점에서 사 온 것에 지지 않는다. 파리 여자는 자기 생긴 모양을 알아가지고 제 체격, 제 얼굴과 조화 있게 해 입으니 루이 14세의 진수가 프랑스 국민성에 꼭 박힌 덕분인지 사람 자체가 예술품으로 보인다.”


남자아이를 보면서는 남녀평등을 발견한다. “어린 남자아이가 아침저녁을 먹을 때면 테이블 위에 식기를 가져다 놓고, 누나들이 설거지하면 행주질을 하고 추운 아침에도 계단 걸레질을 한다. 남자아이라도 어렸을 때부터 차별 없이 자기 일을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다.”


긴 여행을 마친 나혜석에게 조선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녀가 보기에 조선 여성은 시도 때도 없이 부엌에 들어가 반찬을 만들고, 하루 종일 온돌방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다. 반대로 유럽 여성은 창조적이며 예술적이다. “인격으로나 두뇌로나 기술로나 학술로나 조금도 남자의 그것보다 결핍하지 아니하여 당당한 사람의 지위에 있다.”


이런 깨달음은 귀국 후 작품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파리의 야수파 미술연구소에서 그림 그리며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해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 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했다. 이즈음에 그린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나혜석은 파리에서의 불륜 사실이 드러나 나락에 떨어지고 만다. 남편이 파리를 비운 사이 3.1 독립운동 33인 중 한 사람인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만나 제법 깊이 교제를 한 것이다. 남편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했고 나혜석은 이혼하지 않겠다고 발버둥쳤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추후 2년간 재결합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으나 남편은 곧바로 다른 여성과 결혼해 버렸다. 


남편이 떠나고 자녀 양육권마저 빼앗긴 나혜석은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최린도 그녀를 외면했고, 돈을 벌기 위해 작품전을 열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불륜녀란 나쁜 이미지가 크게 작용한 탓이다. 불행이 계속되면서 나혜석은 점차 여성 해방론자로 변해갔다. 1934년 ‘삼천리’에 게재한 ‘이혼고백서’는 남성중심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고발장이다. 여자만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났건 못났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 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최린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였다. 최린은 나혜석에게 생활비 지원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자신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으나 최린은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대한 불만도 소송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 실익은 없었다.


이후 나혜석은 작품 활동과 여성 운동을 계속했으나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바람피워 이혼당했다는 사회적 비난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이 큰 이유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그녀를 괴롭히더니 파킨슨병과 중풍까지 찾아왔다. 그녀는 자녀들한테서도 외면당하는 바람에 죽는 날까지 혼자였다. 결국 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의 불륜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녀가 부르짖은 여성해방의 목소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광복 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남녀평등이 제대로 반영된 데는 이런 목소리들이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 선각자들의 맹활약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본다.


나혜석을 깨우치게 한 것은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와 전혀 다른 서양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직접 살펴보았기에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이 정답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그녀의 당당한 외침은 여행을 통한 자아 재발견의 산물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가갸날, 2018

<나혜석의 고백> 나혜석, 조일동 편저, 이다북스, 2021

<여행자-근대 조선의 여행자들> 우미영, 역사비평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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