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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r 01. 2023

<8> 12세 소년이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다

-이위종의 북아메리카 횡단열차 여행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활약했던 이위종(1884~ ?)은 한국인 최초의 ‘국제인’이라 하겠다. 


어린 시절 미국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덕에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에 능통한 외교관이었다. 일본 당국의 체포령 때문에 죽는 날까지 조국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했지만 그의 불꽃같은 인생은 ‘시베리아의 별’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위종은 금수저 출신이다. 


할아버지 이경하는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이범진은 구한말 정치권의 주목받는 인물이었으며 미국, 프랑스, 러시아 주재 공사를 잇따라 역임했다. 갑신정변이 발발한 1884년에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1896년 주미 공사로 발령 난 아버지를 따라 워싱턴으로 갔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이위종은 어린 나이에 광활한 북아메리카 대륙에 몸을 실었다. 영국 우편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밴쿠버항에 도착한 일행은 기차를 이용해 눈 덮인 로키산맥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달렸다. 워싱턴을 향한 기차는 위니펙과 토론토, 오타와, 몬트리올, 퀘벡을 지나 동부 대서양 연안인 헬리팩스까지 내달렸다.


신대륙을 첫 체험하는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그의 정신세계는 봉건 유교사회에서 단숨에 근대 문명사회로 진입했을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근대와의 만남이 설렘과 함께 두려움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출국 전에 영어공부를 제법 했지만 미국 아이들과 말이 통할지,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백인 아이들에게 멸시당하지나 않을지 머리가 꽤나 복잡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아버지가 미국에 오면서 본처대신 소실(첩)을 데리고 왔기에 사춘기에 접어든 이위종이 그녀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서울에 두고 온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알아챈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멋진 여행 기회를 마련했다.


북아메리카 대륙 횡단열차 여행. 뉴욕을 출발해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새크라멘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동서 횡단열차를 말한다. 13세 되던 1897년 여름, 약 한 달 동안 공사관 직원의 통역 안내를 받는 ‘왕자 여행’이었다. 미국에서도 열차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이런 기회는 각별한 것이었다.


여행 기간 학업 부담이 없었기에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단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9월까지 약 2개월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차는 평균 시속 30~40 킬로미터 속도로 천천히 서쪽으로 달렸다. 역마다 섰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서울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백인 승객들은 당당한데 비해 쿨리(중국인 저임금 노동자)나 흑인, 인디언들은 하나같이 주눅 든 채 삶이 고단해 보였다. 백인들이 쿨리나 흑인들에게 거칠고 무례하게 대했지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 노예해방이 이뤄진 나라임에도 신분격차가 여전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위종은 통역을 맡은 ‘아저씨’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대해 온갖 새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세계사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혼자서 느긋하게 사색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자기 성찰의 기회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얼 하고 살 것인가?


여행 중에 그는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과는 뭔가 색다른 인생을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초등학생 나이에 미국 땅을 밟았으며, 아버지를 따라 백악관 행사게 갔다가 대통령 부부와 악수를 나눈 자신은 이미 딴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조그마한 나라에 갇혀 살지 않고 드넓은 세상을 누비며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위종은 넓은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중학교에 진학해 공부에 매진했다. 영어 실력은 빠른 속도로 향상됐다. 


미국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친 이위종은 프랑스 주재 공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뒤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아버지가 다시 러시아 주재 공사로 부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자 그곳에서 참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귀족 출신 외교관 딸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이위종은 1907년 고종 임금의 밀명을 받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운명을 맞이했다. 3인 대표단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지만 만국기자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인 한반도 침략행위를 조목조목 신랄하게 공박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 때였다.


일본은 이를 문제 삼아 서울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후 평생을 러시아에서 떠돌며 살게 된 이유다.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최재형,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러시아의 대독일 전쟁에 참가했으며, 그 후 볼셰비키 혁명군 장교로도 활약했다. 봉건과 근대, 동양과 서양, 약소국과 강대국의 경계인으로 살다 간 애국적 로맨티시스트의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이위종은 누가 봐도 국제인이다.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평생 서양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다. 국제결혼까지 했다. 외교관 아들의 숙명을 타고났지만 어린 시절 북아메리카 횡단열차 여행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0대 초반 나이에 벌써 세상이 한없이 넓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우물 안 개구리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자란다. 


꿈은 넓은 세상을 봐야 커진다. 넓은 세상을 보려면 여행을 즐겨 자주 해야 한다. 어릴수록 좋다. 이위종 같은 금수저 출신이 아니더라도 자녀들에게 이곳저곳 여행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 바다나 큰 산, 박물관이라도 괜찮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이승우, 김영사, 2019

<주미공사 이범진의 미국 여정과 활동> 김철웅, 역사학회, 2010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오영섭,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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