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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r 02. 2023

<9> 14세 어부 소년, 호기심으로
미국에 가다

-존 만지로의 일본인 최초 세계일주

“선장님, 미국을 보고 싶습니다. 일본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겠지만 선장님이 도와주신다면 이번 기회에 미국 땅을 꼭 밟아보고 싶습니다.”


존 만지로(1827~1898)는 일본인 최초의 국제인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세계일주까지 한 첫 일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중엽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지독하게 가난한 어부 출신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수습어부가 되어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돼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면서 넓은 세상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특유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를 최고의 글로벌 인재로 만들었다. 


1841년, 만지로 일행은 조업 중 폭풍우를 만나 일본 해안선에서 남쪽으로 750 킬로미터나 떨어진 무인도에 표착했다. 5명의 어부는 그곳에서 143일간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견딘 끝에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미국 포경선 존 하우랜드호에 의해 구조된다. 꼬마 소년 만지로는 배에서 윌리엄 휘트필드 선장의 귀여움을 받아 지구의를 통한 세계 지리와 영문 알파벳을 배웠다. 


포경선은 고래잡이를 계속하다 일행이 구조된 지 약 5개월 만에 하와이에 도착한다. 이제 어부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포경선에서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이때 만지로가 선장에게 한 말이다. 


다른 선원들과 달리 만지로만 미국행을 원했고, 선장은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미국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선장은 그의 이름을 배 이름을 따 ‘존 만지로’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동네 출신 어부 일행과 헤어져 미지의 땅 미국으로 향하는 소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위험에 처하지나 않을지, 키다리 미국 아이들이 자그마한 동양인이라고 놀리지나 않을지, 선장이 지금은 호의적이지만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데, 다른 어부들이 나만 빼고 귀향하면 어머니가 크게 상심하실 텐데… 


하지만 만지로에게는 걱정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그동안 휘트필드 선장에게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땅은 일본보다 수십 배나 넓다는데, 생김새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산다는데, 하느님 믿는 사람이 많다는데, 흑인 노예가 있다는데, 도시에는 높은 빌딩이 많다는데…


존 하우랜드호는 길버트 제도와 괌, 대만 등지 태평양에서 오랫동안 조업을 더하고서야 모항인 미국 동부 뉴베드퍼드항에 도착했다. 만지로가 구조된 지 2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만지로는 선장의 배려로 미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녔다. 옥스퍼드 스쿨이라 불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기초부터 배웠다. 공립 중학교에서 공부하는가 하면 바틀렛 아카데미에서 항해와 관련된 이론과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일본을 떠나온 지 벌써 5년, 미국에서 생활한 지도 3년이 지났다. 이제 만지로는 믿음직한 19세 청년으로 성장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 지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다시 포경선을 타는 일이었다. 


만지로는 포경선 프랭클린호에 일자리를 얻어 뉴베드퍼드항에서 출항했다. 한 달 만에 대서양을 가로질러 케이프 베르테 제도의 산티아고에서 땔감과 돼지고기를 보급받은 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조업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괌, 류쿠국(오키나와),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출항한 지 3년 반만이었다. 이 기간 항해사로 성장해 부선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제 만지로의 당면 목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채취해 귀국 자금을 든든히 마련한 다음,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로 가는 무역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을 떠난 지 9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일본 막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국내외 대형 선박의 입출항을 금지했고, 타 지역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막았다. 그동안 만지로가 귀국 시도를 미룬 것도 이 때문이다. 만지로는 류쿠국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나가사키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24세, 고향 땅에서 어머니를 만난 것은 꼭 10년 만이었다. 


귀국한 만지로는 미국의 언어와 지식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스파이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국가 지도층은 그의 지식을 활용하고자 호의적으로 대했다. 막부는 1853년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만지로를 에도(도쿄)로 불러 올린다. 막부 쇼군은 그에게 10년간의 해외 경험을 정리한 보고서를 올리게 한 뒤 신분을 말단 평민에서 무사 계급인 하시모토로 승격시켜 옆에서 일하도록 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1853년과 54년 연이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러 왔을 때 만지로는 자신의 미국 경험을 전하며 막부에 개항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그리고는 쇼군의 개항 협상에 참석해 통역을 맡았다. 수교 후 초대 주미 일본대사관에 파견돼 통역을 담당했으며, 도쿄제국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선진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을 전수해 일본 해군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소년 만지로가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어 하와이에 갔다가 곧바로 귀국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인생은 초라하게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만지로는 글을 배우지 않은 일자무식이었다. 천성이 영리하고 부지런해서 어머니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평생 거칠게 일해야 하는 어부의 한계를 벗어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4세 어부 소년의 호기심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긴 여행으로 이어졌다. 미국을 속살 깊숙이 경험했으며, 포경선을 타고 지구를 두 바퀴나 돌았다. 세상을 보는 그의 시각이 얼마나 넓어졌겠는가? 일본 역사가 근대화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여행 덕분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존 만지로> 오카자키 히데타카, 김현용 옮김, 학사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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