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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r 04. 2023

<10> 호기심과 관찰력이 특급
기행문을 낳다

-연암 박지원의 북경, 열하 여행

“나는 비록 삼류 선비지만 청나라의 진짜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었고,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말하리라.”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는 기행문의 백미다.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버드 비숍의 그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끝없이 파고드는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취재기자의 세밀한 관찰력이 특급 기행문을 낳았다. 여행지의 산수, 인물, 문화, 역사가 멋지게 어우러진 대서사시라 해야겠다.


열하일기는 1780년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정부사절단에 끼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귀국한 뒤 저술한 책이다. 사절단 단장이던 삼종 형 박명원이 자신의 개인 수행원으로 그를 임명해 데려간 것이다. 말이 수행원이지 실제로는 특별한 임무가 없는 일종의 프리랜서였다.


청나라 여행길에 오를 때의 43세 박지원은 자유인이었다. 


집권 세력이던 노론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벼슬도 탐하지 않았다. 마음 맞는 선비들과 어울려 다니며 책을 읽거나 시문 짓는 것을 즐겼다. 마음 맞는 선비이란 실학을 낳은 북학파 인사들을 말한다.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 유언호 등이다.


여행은 약 5개월 일정이었다. 음력 5월에 서울을 출발해 심양과 북경, 전인미답의 열하를 거쳐 10월에 돌아왔다. 압록강 건너갈 때의 행장을 살펴보자. 그를 수행하는 하인 창대와 장복이 말 앞뒤에 섰다. 말안장 양쪽에 주머니를 하나씩 달았다. 왼쪽 주머니엔 벼루를 넣고 오른쪽 주머니엔 붓 두 자루와 먹 하나, 공책 몇 권을 넣었다. 미지의 땅을 취재하려는 민완 기자의 모습이다.


그의 여행 목적은 눈에 보이는 산천과 고적 따위를 답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긴 시간 사절단 일행과 보조를 맞추되 틈만 나면 옆으로 샜다. 호기심이 발동해서다. 지나가는 여인들의 옷가지와 장신구, 머리모양을 유심히 살피는가 하면 이런저런 점포에 수시로 뛰어들어가 진열한 물건을 살핀다. 크고 웅장한 것뿐 만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도 눈길은 준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열하일기에 나오는 박지원의 여행 소회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앞서 청나라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온갖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앞다퉈 말하지만 자신은 깨진 기와 조각과 더러운 똥거름이 장관이란다. 깨진 기와 조각으로 담장 위를 예쁘게 장식하고, 짐승 똥오줌을 논밭 거름으로 알뜰하게 활용하는 청나라가 부럽다는 취지다. 이용후생의 정신이 녹아있다.


그의 단편소설 호질문(虎叱文)의 탄생 배경을 들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한 점포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벽에 가느다란 글씨의 기이한 문장들을 발견한다. 내용이 하도 재미있어 저녁식사 후 정 진사를 대동하고 가서 베낀다. 일자무식 점포 주인이 그걸 베껴서 무얼 하려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귀국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히려고 합니다. 응당 배를 잡고 웃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뒤집어질 것입니다. 웃느라고 입 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져 나올 것이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확인해 봤더니 정 진사가 베낀 뒷부분은 잘못 썼거나 빠진 글귀가 너무 많고 도무지 문장이 되질 않아 자신이 땜질을 해서 글 한편을 만들었다고 열하일기에 썼다.


청나라식 소방차라 할 수총차(水銃車)와 관련한 묘사에서도 그의 남다른 호기심과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밤 민가에서 불이 나 수총차 세 대가 불을 끄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잠시 세워 모양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조선에 알리기로 마음먹는다. 


“네 바퀴로 된 수레 위에 나무로 만든 큰 물통을 한 개 설치하고 물통 안에는 대형 구리그릇을 두었다. 구리그릇 안에는 구리대롱 두 개를 두었고, 구리대롱 중간에 새 목처럼 생긴 물총을 세웠다. 물총에는 다리 두 개가 있어 좌우의 양쪽 구리대롱과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당에 들러 벽과 천장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리고는 “보통 사람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헤아릴 바가 아니고 언어와 문자로도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인상 비평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어 일부만 소개해본다.


“내 눈으로 그림 속의 인물을 보려고 하자, 번개처럼 번쩍번쩍하면서 광채가 내 눈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림 속의 그가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싫었다. 내가 귀로 들어보려고 하자, 굽어보고 올려보며 돌아보고 흘겨보며 흡사 소리가 없는 것에서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내가 입으로 말하려 하자, 그가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가 뇌성벽력을 지르는 것 같았다…”


박지원은 밤마다 현지 선비들을 만나 필담으로 고담준론을 나눈다. 지동설에 대해 토론하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어느 날 곡정이란 선비를 만나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무려 16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필담에 종이 서른 장이 필요했단다.


박지원의 호기심과 열정은 열하 방문을 대하는 자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하자 황제는 여름휴가 차 북경 동북 지방에 있는 열하에 가고 없었다. 열하까지 찾아오라는 황제의 요구가 전해지자 사절단 일행은 실의에 빠졌으나 반대로 박지원은 미지의 땅에 가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조선 선비들이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을 내가 처음 가볼 수 있다니…’


그에게 열하는 별천지였다. 몽고, 티베트, 이슬람 등 난생처음 보는 종족과 기이한 동물들, 진기한 보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지원은 감탄했다. “참으로 내 평생 열하에 있을 때만큼 기이한 구경을 한 적이 없다.”


박지원 이전에도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은 꽤 많다. ‘연행록(燕行錄)’이란 이름으로 책을 쓰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열하일기 같은 명물대작은 전무후무하다. 그의 호기심과 관찰력, 문장력이 남달랐지만 사전 준비와 사후 마무리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큰 벼슬을 하지도 않았고, 학문적 업적이 대단한 저술을 남긴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열하일기 한편으로 그의 인생은 역사에 빛난다. 후세 여행객들에게 호기심과 관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 것만 해도 존경스럽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열하일기 1, 2, 3>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17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 그린비, 2007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고미숙, 작은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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