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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y 30. 2023

<22> 온천 도시를 돌며 심신을
단련하다

-미셸 드 몽테뉴의 이탈리아 등 4개국 여행

수상록’을 저술한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신장결석과 배앓이로 평생을 고생했다. 신장결석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질이었으며, 그나마 각별하게 관리했기에 그것 때문에 죽음이 크게 앞당겨지지는 않았다.


그가 로마를 최종 목적지로 삼아 장기 여행에 나선 것은 47세 때인 1580년 6월. 파리를 거쳐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1월이었으니 무려 17개월간의 여정이었다. 여행 출발 당시의 철학자 몽테뉴를 떠올려보자.


그는 프랑스 남부 보르도 근교의 낡은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후에 보르도 시장을 역임했다. 몽테뉴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조세재판소와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당시 프랑스에선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으로 위그노 전쟁이 벌어져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온건 가톨릭 신자로서 광신적 종교 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몽테뉴는 낙마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법관직을 돌연 사임했다. 1570년,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미 그는 공직과 정치, 사업 등에 지쳐있었다. 이제 각박한 세상 일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깊이 탐구하고 싶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몽테뉴 성에 1000권의 책으로 멋진 서재를 꾸며 독서와 집필에 몰두한 이유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수상록’은 이후 약 10년간의 연구 결과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문학적, 철학적으로 조망한 이 대 저작물을 처음 출판한 것은 해외여행을 떠난 1580년의 일이다. 


심혈을 기울여온 작품을 마무리했기에 그의 여행길은 무척 즐겁고 홀가분했을 것이다. 비록 스스로의 선택으로 10년간 은둔생활을 했지만 애당초 활발한 성격과 불꽃같은 열정의 소유자이기에 계속 서재에 파묻혀 살 사람은 아니다. 수상록 집필 중에도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수시로 파리 궁정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 특유의 지적 호기심이 그를 해외여행에 나서도록 부추겼다고 봐야겠다. 


여행의 또 다른 이유는 충전과 치유였다. 갈수록 악화되는 건강을 애써 호전시키려는 정황은 그가 저술한 ‘몽테뉴 여행기’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지병인 신장결석을 치료하는데 온천수가 최고라고 믿고, 여행길 도시의 온천에는 빠짐없이 들렀다.


여행에는 주로 말을 이용했다. 짐은 마차에 싣되 자신은 가는 곳마다 늘 말을 빌려 타고 이동했다. 그의 여행은 발 닿는 대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계획된 명승지 관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유명한 곳은 일부러 피했을 정도다. 색다르기만 하면 무엇이든 구경거리라는 게 몽테뉴의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파리를 방문해 지인들을 만난 몽테뉴는 플롱비에르로 이동해 10여 일 간 온천을 즐겼다. 신장결석을 제거하기 위해 하루 여러 번 온천수를 마셨으며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번갈아 가며 목욕했다. 그 효과로 배속이 요동치면서 아랫배와 요도 쪽으로 돌멩이가 내려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 방광에 들어있던 작은 돌멩이 몇 개를 배출하고 오줌에 모래알이 섞여 나오는 것을 경험한다.


국경을 넘어 스위스 바젤과 샤프하우젠을 관광하고는 독일로 들어가 콘스탄츠, 아우크스부르크, 뮌헨 지역을 둘러보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선 펜싱경기를 관람하고, 뮌헨에선 공작의 아름다운 숲을 구경했다. 오스트리아 티롤까지 둘러본 몽테뉴는 곧장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여행 기간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베네치아,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 로마, 루카, 밀라노에서의 일정은 역사와 문화,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여행지였다. 특히 로마는 호기심 많은 몽테뉴에게 환상적인 즐거움을 안겨줬다. 세계 중심지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 곳곳에 있는 각종 유적과 궁전, 성당, 박물관, 도서관을 매일 탐방했으며 관심 가는 사람이라면 귀천을 막론하고 만났다.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와 귀족, 학자는 물론 상인과 화류계 여인들도 만나 그들의 삶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범죄자 처형 장면을 구경하고, 유대인 할례 의식을 관찰하는가 하면 농사꾼 아낙네들을 무도회에 초청해 보기도 했다.

 

몽테뉴는 로마가 외국인들도 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국제도시인 사실에 감탄하면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다. 로마를 그만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온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역사문화 이상으로 컸다. 온천도시 루카를 특별히 찾아간 이유다. 피렌체를 거쳐 루카에 도착한 몽테뉴는 인근 빌라온천에서 두 차례, 한 달 이상 머물렀다.


빌라온천은 당시 세계 최고의 온천으로 소문난 곳으로 숙박시설과 식당도 최고급이었다. 그는 매일 온천수를 배가 부르도록 마시는가 하면 냉온탕을 오가며 하루 종일 목욕했다. 몸속의 돌과 모래알을 끊임없이 배출했기에 몽테뉴는 어느덧 건강 회복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건강이 좋아진 것으로 프랑스에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한창 온천을 즐기고 있던 1581년 9월 그는 자신이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고, 오랜 기간 세상사와 담쌓고 지내온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곧바로 로마로 이동해 여행을 마무리한 다음 귀국길에 올랐다. 


몽테뉴는 이후 4년간 보르도 시장을 지냈으며, 이후에도 앙리 3세가 암살당한 뒤 왕위 계승권 다툼을 거쳐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관직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몽테뉴가 이 여행에서 활력을 회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장에 선출되어 급히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외견상 더 젊어지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한 모습이었다. 2년 뒤 막내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신장결석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지만 시장직을 별 탈 없이 수행한 것을 보면 비교적 건강한 생활을 유지한 것 같다.


여행은 그에게 심신 치유뿐만 아니라 지식과 지혜 함양에도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드넓은 세상을 관찰하고 각계각층의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 후 ‘수상록’을 여러 차례 수정 보완한 이유 아닐까 싶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여행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생활 방식이나 관습에 계속 노출되고, 대자연이 이루는 다채로운 풍광을 즐기는 것만큼 인생을 단련시켜 주는 훌륭한 학교는 없다.”

 

참고한 책

<몽테뉴 여행기> 미셸 드 몽테뉴, 이채영 옮김, 필로소픽, 2020

<위로하는 정신>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유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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