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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y 25. 2023

<21> 성스러운 땅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예루살렘 여행

중년 시인은 몸과 마음이 무척 지쳐있었다. 10년 간의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에 입문했으나 의회 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만다. 하나뿐인 피붙이, 10살짜리 딸 쥘리아는 중병에 걸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충전과 치유가 시급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낭만주의 서정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은 인생에 활기를 되찾고자 근동지역으로 홀연히 여행을 떠난다. 베이루트, 예루살렘, 텔아비브, 다마스쿠스, 이스탄불…. 지중해 동쪽 근동지역은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최고 인기 여행지였으며, 라마르틴 역시 꿈에 그리던 곳이다. 따스한 그 지역 날씨가 딸의 건강 회복에 도움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은 당시 오스만 튀르크 지배하에 있었지만 희망의 평화도시로 여겨졌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는 곳이어서 아름다운 영혼과 숭고한 사랑을 손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성스러운 3천 년 고도에서 다윗과 예수와 마호메트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니….”


라마르틴이 동쪽을 향해 프랑스 마르세유를 출발한 것은 1832년 7월. 그의 나이 42세. 장기 임대한 배에는 아픈 딸과 몇 명의 지인, 하인이 함께 탔으며 많은 양의 책이 실렸다. 그리스 아테네를 거쳐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에 페스트가 창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나 기다려 온 여행인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라마르틴은 일행을 남겨두고 10월에 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당국은 페스트 예방 조치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말을 타고 예루살렘 성의 다마스쿠스 문을 지나 얼마 안 가서 기드론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어 올리브산 서편 기슭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2천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주 올라 기도하며 하느님과 교제했던 곳이며, 죽기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라마르틴은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여, 저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고통이 하루빨리 떠나게 하시고 평화의 미래를 열게 해 주옵소서!”


라마르틴은 다시 말을 타고 올리브산 정상에 올랐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승천한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폐허가 되어 그 잔해가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었다. 정상 한편에 자리 잡고 앉으니 예루살렘과 시온산, 사해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스도는 이 혼잡한 세상을 심판하러 언제쯤 다시 오실까?”


라마르틴에게 가장 큰 영감은 준 곳은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 예수무덤 성당(성묘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바로 옆에 마련된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비잔틴 건축물이다. 그리스도 부활 전승의 현장이기에 설렘은 더없이 컸다. 


하지만 이 성당은 로마 건축 시기, 십자군 전쟁, 오스만 튀르크 지배를 거치면서 온갖 풍상을 안고 있기에 여행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도 기독교 6개 종파가 공동 관리하고, 문 열쇠는 이슬람이 관리하고 있으니 그에 딸린 사연이 얼마나 많겠는가.


라마르틴은 이 성당이 정치적 적대 세력인 투르크인들이 정성 들여 관리하고 있는데 감탄을 자아낸다. 유럽에서 온 기독교 신자들이 불편 없이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투르크인들을 비난하고 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라마르틴은 이런 핵심 성지 말고도 10여 일간 예루살렘 중심가와 교외를 오가며 영혼의 안식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동안 소홀했던 기도에도 열중했다. 이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음속 깊이 장착했다.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 쥘리아가 그 해 12월 베이루트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건 아니지만 태어난 지 1년여 만에 아들이 죽었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슬픔이 컸다. 


그러나 라마르틴은 좌절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충전한 믿음의 힘은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짐을 챙겨 다마스쿠스와 이즈미르를 여행한 뒤 동로마제국 수도였던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 달쯤 머문 뒤 베오그라드와 빈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1년여간의 긴 여행에서 재산 대부분을 소모했으나 삶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은 넘쳐났다.


여행 후 라마르틴은 시작(詩作)과 정치에 몰두한다. 그는 30세 때 발표한 ‘명상시집’으로 이미 프랑스 낭만주의 시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했던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사랑의 감정을 평이하면서도 음악적인 문체로 큰 감동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다녀온 뒤 그의 시는 한층 성숙해졌으며, 어느새 프랑스 낭만파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 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사형제도와 노예제도에 반대하고, 투르크인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진보 정치세력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1848년 외무장관과 임시정부 책임자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3년 뒤 나폴레옹 3세 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라마르틴에게 예루살렘 여행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성스러운 곳이어서 일까,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시련과 고통을 덜고, 한껏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행은 역시 충전이자 힐링인가 보다. 

 

참고한 책

<라마르틴의 이스라엘> 알퐁스 드 라마르틴, 최인경 옮김, 그린비, 2010  

<라마르틴 시선> 알퐁스 드 라마르틴, 윤세홍 옮김, 청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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