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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y 22. 2023

<20> 세계를 향해 희망의 창을 열다

-김찬삼의 14년 세계 배낭여행

세계 일주 3회, 세계 테마여행 20여 회,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 방문.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배낭여행가 김찬삼(1926~2003)의 여행 기록이다.  거리로 따져 지구 둘레를 32바퀴나 돌았으며, 여행에 할애한 시간이 무려 14년이나 된다. 일생의 5분의 1 가량을 길에서 보낸 셈이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해야겠다.


소년 시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장차 여행가가 되어 서방견문록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김찬삼. 그가 쓴 각종 여행기는 100만 부 이상 팔려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꿈을 심어줬다. 여행기는 동화 형식으로 제작되어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궁핍했던 시절 세계와 미래를 향해 희망의 창을 열었다고 해서 틀리지 않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김찬삼은 아버지가 법관이어서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대법관을 지낸 아버지 김세완은 아들이 초기 세계 여행에 심취해 있을 때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지냈다. 


김찬삼은 등산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부터 자주 산에 올랐으며 수영도 즐겼다. 인천에 살던 중학생 시절 부둣가에서 뛰놀며 5대양, 6대주를 여행하는 마도로스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것은 이런 희망이 반영된 것이리라. 서울대 지리교육학과를 졸업한 김찬삼은 한동안 숙명여고와 인천고에서 지리 교사를 역임했다.


고등학교 교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진작 결혼해 처자를 두었지만 아버지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과에 등록한 것이다. 세계 여행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1950년대 말 당시 세계여행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내외 최빈국이어서 국내여행조차 제대로 꿈꿀 수 없던 시절이었다. 입국이 아예 불가능한 미수교국이 적지 않은 데다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는 치안이 매우 열악했다. 이런 때 세계 일주 여행을 꿈꾸다니….


그가 첫 여행길에 오른 것은 33세 때인 1959년 8월 7일. 먼저 알래스카로 향했다. 백야와 설원, 빙산이 제일 먼저 보고 싶어서다. 첫 여행에서 자신감을 얻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김찬삼은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아내에게 미안함과 당부의 말을 전하는 유서를 썼다. 한 통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친구에게 맡기고 또 다른 한 통은 자기 품 속에 넣었다. 스스로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겠다.


중고 자동차를 구입한 김찬삼의 여행길은 종횡무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미시시피강, 루이지애나, 뉴욕 등지를 여행하고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멕시코로 향했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를 거쳐 안데스 산맥과 마추픽추의 나라 페루로 내달렸다. 칠레를 거친 김찬삼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국경이 만나는 이과수 폭포에서 장엄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브라질에서 여행 전문가 지인의 집에 머물며 몸과 마음을 충전한 김찬삼은 고행의 아프리카 여행길에 오른다. 여객선을 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건너와서는 아프리카 내륙을 깊숙이 탐험하며 북상했다. 해안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하겠지만 검은 대륙의 속살을 직접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츠나와, 잠비아, 모잠비크, 말라위, 탄자니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이동하는 길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아프리카 종단 여행을 마쳤을 때 그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쳐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여기서 중단하면 세계 일주는 영영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어섰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터키 등 서아시아를 섭렵한 김찬삼은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선 오토바이를 타고 각국을 돌아다닐 계획이었으나 체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그건 무리였다. 대신 기차를 타고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둘러보았다. 유럽에 이어 육로로 인도와 동남아까지 여행한 후 귀국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나 더 이상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일본을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61년 6월 22일. 1년 10개월 간의 1차 세계일주는 그렇게 끝났다. 가족의 품에 안겨 푹 쉬려는 김찬삼에게 휴식은 찾아오지 않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신문 및 방송 기자 수십 명이 그를 에워쌌다. 그동안 세계 여행 소식이 간간이 국내에 소개되어 그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김찬삼은 주요 일간지에 귀한 사진과 함께 여행기를 장기 연재하는가 하면, TV와 라디오에 출연해 여행 중 겪은 온갖 진기한 경험들을 소개했다. 당시 매스컴에서의 인기 정도는 최고 수준의 철학자 김형석과 안병욱, 국문학자 양주동, 국어학자 한갑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세계일주는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60여 년 전만 해도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치안 상태를 생각하면 목숨 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지인에게 속아 따라갔다가 실랑이가 벌어져 격투 끝에 풀려나는 일, 노상강도를 만나 가진 것 모두 털린 일, 맹수를 만나 곤욕을 치른 일….


김찬삼은 천성적으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현지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되었다.  아끼던 오토바이와 자동차에 각각 ‘우정 1호’ ‘우정 2호’란 이름을 붙였듯이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신뢰를 쌓았다.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러 간 것도 이런 친화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963년 아프리카 여행길 중 슈바이처 박사에게 만남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후 가봉의 랑바레네 병원을 찾아갔다. 김찬삼 37세, 슈바이처 88세였다. 젊은 동양인은 이곳에서 보름이나 머물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 슈바이처로부터 인생에 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직에서 퇴직한 1992년 그는 중국 인도, 아프가니스탄에 걸쳐있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실크로드를 답사하고 유럽 각국을 샅샅이 여행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66세 때의 일이다. 불세출의 여행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서 있어서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본다. 나는 여행의 신을 믿는다. 나는 지도와 카메라만 있으면 그 어떤 곳도 두렵지 않다. 길 위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의 진취적 기상과 불굴의 모험심은 후배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꿈은 없다고 한다. 열정만 있으면 1%의 가능성만 있어도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김찬삼의 가르침 아닐까 싶다.

 

참고한 책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김찬삼추모사업회, 이지출판, 2008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 김찬삼, 디자인하우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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