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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n 03. 2023

<23> 할리우드 악동이 박애주의자가 되다

-안젤리나 졸리의 캄보디아 여행

할리우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1975~ )의 청소년기는 방황과 일탈의 연속이었다. 


출생 직후 부모가 이혼한 데다 아버지와 극심한 불화를 겪으면서 생긴 유년기 우울증은 청소년이 되어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툼한 입술과 각진 얼굴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으며,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떨어져 집단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괴팍하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가 하면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었고, 마약은 기본이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유다.


21세 때인 1996년 첫 결혼을 했으나 3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듬해 재혼했지만 검은 옷만 골라 입는 우울증과 불 같은 성격은 좀체 고쳐지지 않았다. 배우로서 이름이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스타는 아니었다. 이 무렵 졸리는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라 할 캄보디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 그녀 나이 25세 때다.


 졸리는 판타지 액션 영화 ‘툼레이더’의 주인공으로 발탁돼 촬영을 위해   세계 최빈국 캄보디아로 건너간다. 2001년까지 머물면서 그녀는 그 나라를 구석구석 여행했다. 


이념 대립으로 비롯된 20년간의 긴 내전이 끝나긴 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궁핍했다. 그녀에게 전쟁의 상처와 난민, 질병, 빈곤은 사실상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인구 2000만 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무려 200만 명이나 학살된 킬링필드의 현장을 방문하고는 치를 떨어야 했다.


현재 관광지로 홍보되고 있는 씨엠립 톤레삽 호수의 선상마을은 또 어떤가.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접근할 때 선상마을 아이들이 황토물에 경쟁적으로 뛰어들며 ‘원 달러’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졸리는 슬픔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가진 자들이 빈곤을 이렇게 방치해도 된단 말인가?”


졸리는 캄보디아 빈민들, 특히 기아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을 만나면서 그간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되돌아본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태어나 밤낮 휘황찬란한 LA 중심가에서 흥청망청 살고 있는 자신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는 자문해 본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아직도 불만투성이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단 말인가?”


졸리는 태어난 지 7개월 남짓 된 2001년생 남자아이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게 된다. 난민 고아였다. 아이는 낯선 백인 여성에게 한참 안겨 있다 잠에서 깨어나자 이 여성을 빤히 쳐다본다. 여성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으나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훗날 졸리는 당시 아이에게서 신을 느꼈다고 했다.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졸리는 곧바로 입양을 결심했다. 어둡고도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 아이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졸리에게 갑자기 이런 아이라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남편, 많은 지인들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졸리는 기어코 입양을 성사시켰다. 그가 바로 한때 연세대 국제학부 진학으로 관심을 모았던 장남 메덕스다.


졸리는 매덕스를 만나면서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긍정적인 삶,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정치적 탄압이나 전쟁 때문에 타의로 집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유엔난민기구(UNHCR)가 그녀의 새로운 길을 안내해 줬다.


2001년 졸리는 내전 등으로 난민이 수없이 발생하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과 탄자니아를 방문해 빈곤과 질병,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또 내가 가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성심껏 도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자 유엔난민기구는 그녀를 친선 대사, 글로벌 특사로 임명한다. 졸리는 이듬해부터 파키스탄, 태국, 나미비아, 에콰도르, 스리랑카, 코소보 등 20여 개국을 돌며 난민 구호 활동을 펼쳤다. 지금은 난민 구호에 그치지 않고 환경보호, 여성인권, 교육 및 의료 지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입양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아주 큰 사랑에 속한다. 졸리는 매덕스 입양 후에도 베트남과 에티오피아에서 한 명씩 더 입양함으로써 ‘사랑의 여전사’란 이름을 얻었다. 이후 본인도 아이 3명을 낳아 현재 6명의 엄마다. 방황과 일탈, 타인에 대한 분노, 자기 학대에 휩싸여 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의 행복이다.    


졸리가 본업인 배우만큼이나 왕성한 사회운동가, 세계적 박애주의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캄보디아 여행 덕분임에 틀림없다. 바쁜 일정으로 짜인 촬영 여행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충전과 치유를 위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치유란 남에게 반드시 어떤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졸리는 처음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충분히 공감하기만 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면 더 쉽게 치유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머나먼 나라 아이들을 선뜻 입양하고,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분쟁지역을 잇따라 방문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 각종 자선 기구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졸리가 20대 중반 캄보디아에서 얻은 깨달음의 결실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최근 인도주의 패션 브랜드 ‘아틀리에 졸리’를 출시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힘들게 살아가는 난민을 디자이너로 고용하고, 데드 스톡(브랜드나 공장에서 사용하지 않아 남은 직물)을 활용하는 등 패션 사업을 사회문제 해결에 접목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계속되는 그의 자선에 고개 숙여질 따름이다 


졸리를 통해 우리는 단 한 번의 의미 있는 여행이 자기 삶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여행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치유와 성장을 함께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한 책

<안젤리나 졸리의 아주 특별한 여행> 안젤리나 졸리, 박유안 옮김, 바람구두, 2007

<안젤리나 졸리, 세 가지 열정> 로나 머서, 전은지 옮김, 글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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