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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n 16. 2023

<24> 태평양 건너 서양 문명을
엿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미국 여행

1859년,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에 살던 24세 청년이 인접 도시 요코하마로 구경을 갔다. 당시 요코하마는 일본 막부가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5개국과 잇따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유일하게 대외 개방한 도시여서 서양 문물이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었다.


거주 외국인이 많진 않았지만 벌써 서양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고, 길거리에는 간혹 백인들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진작에 한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년 째 네덜란드어로 서양 학문을 익혀온 청년이 이들 외국인에게 말을 건네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가게 간판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 무슨 글자일까?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네덜란드 난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인가?’

 

실의에 빠진 청년은 훗날 메이지 정부 때 사상가, 교육가, 저술가, 언론인으로 활약하며 일본의 서구문명 도입과 국민 계몽에 큰 역할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다. 


청년은 그날 네덜란드어를 구사할 줄 하는 독일 상인을 만나 겨우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만 가게 간판 알파벳은 대부분 영어이며, 길가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 혹은 영국인이란 사실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유키치는 영어 공부가 시급함을 깨달았다. 영어야말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임을 알면서도 다른 서양 학자들처럼 네덜란드어 공부에 올인한 것을 후회했다. 


네덜란드어와 난학은 서양 공부에 별 도움이 안돼. 이제는 영어가 중요해. 막부가 서방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고 개방을 시작한 마당에 국제 언어라 할 수 있는 영어는 필수야.”


요코하마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유키치는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미국과의 조약 체결 때 통역사로 일했던 사람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는가 하면, 나가사키에서 온 소년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걸음에 달려가 만났다. 요코하마 외국인들과 거래하는 상인을 통해 ‘영란사전’을 구입하기도 했다.


영어 공부에 빠져있던 유키치는 우연히 막부가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에 군함을 파견키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약체결 기념으로 일본 군함을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군함은 네덜란드에서 사들인 선박이며, 항해술은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초보 단계 전수만 받았기에 미국 항해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유키치는 곧장 호기심이 발동했다. ‘반드시 저 배에 올라 미국 구경을 해야 돼.’ 하지만 승무원 선발권을 가진 함장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연줄을 들이대 함장을 만나 영어를 잘한다고 큰소리친 덕분에 의외로 쉽게 발탁되었다. 사실은 사고 위험성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은 승선을 애써 피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유키치를 태운 군함 ‘간린마루’호의 미국 항해는 일본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불린다. 1860년 1월 출항해 37일 만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망대해에선 매일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힘겹게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야 했다. 선체가 40도 가까이 기우는 최악의 상황도 여러 번 경험했다. 유키치는 훗날 당시 군함 속 상황을 ‘감옥에서 대지진을 만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25세 일본 청년에게 미국 땅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짚신을 신은 채 호텔 연회장에 들어서자 난생처음 보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술(샴페인)의 마개를 열자 펑하고 소리가 나는 바람에 일행이 모두 깜짝 놀란다. 남녀가 거리낌 없이 어울려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대접받는 듯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미국인의 안내로 공장을 견학했다. ‘갈바니 도금법’을 눈 여겨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엔 전기를 이용한 전등은 없어도 전신은 보급되어 있었다. 미국에는 일본에 희귀한 철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산업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유키치에게 미국은 과학기술 문명보다 정치, 법률, 풍속, 사회생활 같은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조지 워싱턴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미국을 건국한 워싱턴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자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근황을 상세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존경도 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6개월 정도의 여행이지만 미국 구경은 유키치에게 혁명적인 사상적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이 얼마 안 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란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무릎 꿇게 한 유럽이 아직 건재하지만 미국이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란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일본에 돌아온 유키치는 자신이 경영하는 학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자신도 더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미국 여행 중 현지인들과 교제하며 말하기와 듣기를 익힌 덕분에 영어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영어를 제대로 익혀 이 나라 최고의 서양학자가 되고자 다짐하게 된다.


유키치는 얼마 안 가 막부의 외국방에 고용되었다. 외국의 공사, 영사가 막부 각료나 외교관들에게 보내오는 편지를 번역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그 무렵 이미 유키치는 영어 잘하는 사람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거기다 젊은 나이에 서양 문물을 깊이 연구하는 사상가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인재를 그냥 놔둘 리 없다. 이후에도 그는 막부 요청으로 여러 차례 미국과 유럽을 시찰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때 얻은 식견을 바탕으로 서구문명 도입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또한 재야의 대표적 계몽 사상가로서 저술과 번역에 몰두했다.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같은 저서는 중국과의 인연(유학)을 끊고 서양을 본받아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키치는 나카쓰 번에 살던 하급무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을 신봉하는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가풍을 그대로 이어나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머물지 않는 진취적인 아이였다. 일찌감치 가족의 품을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 에도로 거침없이 진출했다. 한학 공부를 중단하고 난학을 공부하더니 미국을 알고 나서는 곧바로 영어에 심취했다. 영어 공부는 미국 여행 기회를 잡게 했다.


그에게 첫 미국 여행은 신문명 답사였다. 비록 샌프란시스코에 한정되었지만 꿈과 호기심이 가득한 청년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문명사적으로 서양이 왜 동양을 앞지르게 되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서양을 더욱 깊이 연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듯 여행은 낯설고 새로운 곳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런 곳에서 현재의 나를 버리고 미래의 나를 찾아 나서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그리운 곳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설 일이다. 아무래도 젊을수록 좋겠다.

 

참고한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허호 옮김, 이산, 2020

<후쿠자와 유키치> 임종원, 한길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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