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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n 25. 2023

<25> 약소국 변호사가 신문명을
만끽하다

-허헌의 미국, 유럽 여행

1926년 5월 31일, 조선 변호사 허헌(1885~1951)은 딸 허정숙과 함께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41세. 서울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 일본을 거쳐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할 참이다.


이런 여행, 100년 전 보통 사람들은 언감생심 꿈에서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서양이 아직 미지의 세계여서 심적 두려움이 적지 않은 데다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기 때문이다. 남다른 모험심과 진취적 기상을 갖췄더라도 선뜻 나서기 어렵다. 이웃 일본으로 유학하거나 여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헌은 어떤 인물인가? 일제 강점기 민족 변호사, 독립 운동가로 맹활약했으며 해방 정국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다 남북 분단으로 월북한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초대 법무장관 이인과 더불어 민족 변호사 3인방으로 불렸다.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허헌은 10여 년 뒤 발생한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러 민족 지도자들을 무료 변론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빈민층을 대변하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다지기도 했다.


각종 사회활동, 문화활동에 적극 참여해 변호사단체 회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맡는가 하면, 동아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간섭과 감시가 심해진 건 당연지사. 딸 허정숙과 사위가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에게 휴식과 인생 돌파구가 필요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해 온 서구 여행이 불쑥 떠올랐다.


그래 떠나자. 가진 것 미련 없이 모두 버리고 3년 정도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자.”


나이 마흔을 넘겼으니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허헌. 땅을 팔아 1만 2000원이란 거액의 경비를 마련했다. 자기 재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수개월 간 영어 개인 교습도 받았다.


허 씨가 제법 유명한 인물인 데다 세계 여행이 희귀한 때여서 부녀의 동정은 뉴스거리였다. 출발 전부터 장안의 화제였으며, 고급 요릿집 ‘명월관’에서 열린 송별만찬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허헌은 자신의 여행을 ‘구미만유(歐美漫遊)’라고 표현했다. 편안하게 미국과 유럽의 선진 문물을 구경하고, 그곳 사람들을 많이 만나 견문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먼저 미국에 2년 정도 머물고, 그곳에서 어학을 공부해 언어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1년 정도 일정으로 유럽 각국을 여행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1년으로 단축되었다. 미국과 러시아에 제법 오래 머문 것을 포함해 11개국을 여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세계일주라 불렀다. 미국에서 공부할 계획이던 딸 허정숙도 건강이 좋지 않아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자신의 여행 스토리를 인기 잡지 ‘삼천리’에 연재했다.


허헌은 변호사, 교수, 기자 등 명함을 3개나 갖고 있었지만 서양 세계는 설렘과 함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일본 요코하마 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하는 태평양 배 위에서도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여행을 망칠 텐데…” 


가장 느낌이 많았던 나라는 단연 미국이었다. 7개월 가까이 머물면서 신문명을 만끽했다. 하와이부터 시작해 샌프란시스코, LA, 시카고, 보스턴, 뉴욕, 워싱턴 등지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유명 대학 도서관의 엄청난 장서에 깜짝 놀라는가 하면, 야회(夜會)에 초대받아 난생처음 왈츠 춤을 춰보기도 했다. 시카고에선 초호화 고급호텔을 예약했다 낭패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대규모 공장을 견학하고는 서방 세계의 경제적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을 오가면서 관찰했던 것들이 너무나 하잖고 왜소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이렇게 앞서가는데 우리는 무얼 했나 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여행기에서 미국을 황금의 나라, 자본주의 최고봉의 나라, 여자의 나라, 향락의 나라, 자동차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일찍이 공화국을 표방한 나라 미국의 의회정치와 선거제도, 사법제도 또한 매우 선진적이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아일랜드에선 의회, 재판소, 감옥 등을 견학하고 신문사와 대학도 방문했다. 그곳에선 여성의 사회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국에서 총리와 야당 당수를 면담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무선으로 사진 전송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다. 선거권을 가진 영국 대학생들이 정치운동에 앞다퉈 관여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허헌은 러시아에서 약 50일 동안 머물면서 초기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자랑하면서도 경제적 낙후를 인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년 기술자들을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 보내는 것이 대표적 사례로 비쳤다.


허헌은 여행 1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중도 좌파적 사회주의 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여행 중 미국과 러시아에 오래 머물렀기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비교하는 눈이 생겼을 것이다. 귀국 후 그의 선택은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었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는 좌우 합작 항일 독립운동 단체다. 이상재, 안재홍, 신채호 등 저명인사 34명이 발기했으며, 회원이 4만 명에 이르렀다. 허헌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며, 광주학생운동 후 맹렬하게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허헌은 완고한 지식인이었다. 일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했다. 해방 정국에서 뜻을 펼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여운형, 박헌영 등과 손잡고 진보정부 수립을 시도했지만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선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확정되자 월북해 북한 정권에 참여한다. 김일성 대학 총장이던 1951년 여름 청천강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허헌은 남북 분단으로 우리한테는 이름이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20세기 민족적 격변기에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66년 인생에서 1년간의 서구 여행은 후반기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나 선명했으며, 사회 개혁 의지는 그 누구보다 강렬했다. 

그가 재산의 상당 부분을 털어 해외 여행에 나선 데서 선각자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저기 낯선 세상을 답사함으로써 지식과 지혜를 넓히려는 노력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참고한 책

<나의 아버지 허헌> 허영욱, 평양출판사, 2015

<허헌 평전> 변은진, 역사공간, 2022

<경성 엘리뜨의 만국 유람기> 허헌 최승희 등, 성현경 엮음, 현문서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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