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대학 모두 퇴학당한 골칫덩어리 문학청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2010)= 미국의 소설가.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아홉 개의 이야기’ ‘프래니와 주이’ 등 39편의 단편소설을 남김.
주인공인 명문 사립고등학교 학생 홀든 콜필드는 어느 날 퇴학을 통보받는다.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변호사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성세대의 속물근성과 위선적 행동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항아다. 부모는 물론 친구 및 교사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소설에선 퇴학 사실이 부모한테 통보되기 전 2박 3일 동안 뉴욕시내를 싸돌아다니며 방탕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 이런 생활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동생 피비가 보고 싶어 몰래 집으로 들어간다. 영리한 피비는 오빠에게 “또 퇴학당했느냐”면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거냐”라고 다그쳐 묻는다. 이에 콜필드는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만일 꼬마들이 절벽을 넘어가려 하면 내가 모두 붙잡아야 해. 그러니까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나가 꼬마를 붙잡는 거야.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나는 그냥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을 하는 거지. 나도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유일한 거야.”(‘호밀밭의 파수꾼’ 정영목 옮김, 민음사, 2023)
콜필드의 성장기 모습은 이 소설의 작가와 닮은 꼴이다. 32세 때 발표한 장편소설 하나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한 샐린저. 그는 학업에 대한 무관심과 성적 부진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퇴학당한 골칫덩어리 청년이었다. 아버지가 권유하는 평탄한 인생길을 외면하고 장래가 불투명한 소설가의 길을 헤쳐나갔다.
샐린저는 1919년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상 물정에 밝은 아버지의 식료품 사업이 번창한 덕분에 뉴욕 중심가 맨해튼의 호화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파트에서는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고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창 시절은 참담했다. 사립 맥버니 고등학교에서의 학업 성적은 형편없었다. 케니스 슬라웬스키가 쓴 ‘샐린저 평전’(김현우 옮김, 민음사, 2014)에 따르면, 수업 태도가 산만하고 교실을 떠나 인근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성적은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였고, 반에서는 거의 꼴찌였다. 1932-1933년 학기의 성적을 보면 대수학 66점, 생물 77점, 영어 80점, 라틴어 66점이었다. 1933-1934년 학기는 더 나빠서 영어 72점, 지리 68점, 독일어 70점, 라틴어 71점이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맨하셋 스쿨에 따로 다니기도 했지만 학교 측은 1934년 후학기 등록을 거부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규율이 엄격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펜실베니아에 있는 밸리 포지 군사학교에 보냈으며, 2년 후 평범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직후 샐린저는 예술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으로 뉴욕 대학교에 등록했으나 학교 주변의 각종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퇴학당하고 만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그를 유럽으로 보냈다. 본인이 성공한 육류 수입업에 아들을 끌어들일 심산이었다. 사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프랑스어와 독일어 연수를 미끼로 삼았고, 대학에서 쫓겨난 아들은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샐린저는 유럽에서 1년을 보내며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다지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연극을 좋아했고, 대학 시절에는 글쓰기가 재미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작가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런 뜻을 아버지에게 전한 뒤 펜실베니아에 있는 어시너스 대학교에 등록했다. 불과 한 학기만 지내다 집으로 돌아온 샐린저는 컬럼비아 대학교 문예창작 수업의 청강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끊임없이 단편소설을 써 출판사에 보내는 등 열정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럽에서 3년 이상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독일 점령 작전에 직접 참가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것은 훗날 저술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군에서 제대한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원형이 되는 단편소설 ‘나는 미쳐간다’를 발표했다. 이후 코네티컷 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호밀밭의 파수꾼’ 집필을 시작했고, 1951년 출판하기에 이른다. 책은 청교도적 사고에 익숙한 기독교계와 일부 학계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지만 논란이 컸던 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젊은 소설가의 이름은 금방 전 세계로 알려졌다.
샐린저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사업에 투신했다면 아마 위대한 소설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인생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아버지의 뜻을 물리칠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여동생 피비는 오빠가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말에 “아빠가 오빠를 죽일 거야”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이에 대한 콜필드의 대답은 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