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빼곤 전 과목 D학점이었던 학교 부적응자, 이본 쉬나드
*이본 쉬나드(1938~ )= 미국의 사업가, 암벽 등반가, 환경운동가, 자선가. 아웃도어 및 스포츠 용품 기업 ‘파타고니아’를 창업하고, 지구 환경보호에 헌신.
남아메리카 최남단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쳐 있는 땅, 파타고니아. 남극과 가까우며 빙하와 사막, 초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개발을 마다하고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암벽 등반가 이본 쉬나드가 아웃도어 기업을 창업하며 이 지역 이름을 사명으로 삼은 것은 그가 기업 가치로 표방한 지구 사랑과 자연보호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감치 세계적인 기업가이자 저명한 환경운동가로 명성을 떨쳤으나 어린 시절은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운 문제아였다. 학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낚시와 등산, 서핑, 자동차 정비 따위에 골몰했다. 공부와는 담쌓다시피 했던 문제의 소년이 어떻게 큰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쉬나드의 전기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영래 옮김, 라이팅하우스, 2020)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학교 부적응자였다. 미국 동북부 메인 주의 캐나다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쉬나드는 8세 때 부모를 따라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공립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급에서 키가 가장 작은 데다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동급생들로부터 끊임없이 따돌림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을 갔으나 그곳에서도 외톨이였다. 성적은 대다수 과목이 최하 등급 D였다. 공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으로 달려가 개구리나 토끼를 잡고, 웅덩이나 강에서 수영이나 낚시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더 엉망이었다. 그의 회고다. “여드름쟁이에 춤 솜씨는 형편없는 데다가 기술 이외에는 어떤 과목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반항아였고 방과 후면 늘 남아서 벌을 받아야 했다. 문제아였던 나는 종종 ‘앞으로는 … 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을 500번쯤 쓰는 벌을 받았다.” 수학 시간은 너무 지루해서 천장을 올려다보기만 했고, 역사 시간은 숨 참는 연습을 하는 기회였다고 한다. 자동차 정비 기술 배우는 시간을 빼고는 학교에 다닐 이유가 딱히 없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쉬나드에겐 등산이 무척 좋았다. 그에게 고등학교 시절은 등산이 거의 전부였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친구들과 어울려 틈만 나면 인근 산과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지에서 암벽 등반을 했다. 2년제 지방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주말에는 어김없이 낚시와 등반을 했다. 등반 모임인 ‘시에라 클럽’의 전문 산악인들과 만나면서 등반 장비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57년 나는 고철상에서 석탄을 때는 중고 화덕과 60킬로그램이 넘는 모루, 집게와 해머를 구입해 대장간 일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등반 장비를 직접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등반 장비 제작을 시작한 이유는 청년 산악인으로서 돈을 절약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당시만 해도 허술했던 장비의 기능을 고도화할 수 없을까 하는 호기심이 컸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고, 자신감도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요세미티의 높은 암벽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며칠간 이어지는 등반을 위해서는 수백 개의 피톤을 박아야 했다. 당시 모든 등산 장비는 유럽산이었고 피톤은 연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한 번 암벽에 박아 넣은 피톤은 그 자리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럽인들은 등반을 ‘정복’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장비는 뒤따르는 다른 정복자들의 등반을 쉽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남겨 두었다. 다시 사용하려고 뽑아내면 피톤의 머리가 부서지곤 했다.”
그는 연철 대신 강철로 피톤을 만들어 암벽에 박았다가 뽑아내 몇 번이고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알루미늄 단조 주형을 구입해 강철로 된 카라비너(타원 또는 D자 형의 강철고리)를 제작해 재미를 보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쉬나드는 아버지 도움을 받아 자기 집 뒷마당의 낡은 닭장을 개조해 작업장을 만들었다. 만나는 산악인들에게 팔아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19세 때의 일로, 그의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한미군에서 군 생활을 마친 쉬나드는 귀국 후에도 등산에 빠져 살았다. 27세 때 ‘쉬나드 이큅먼트’라는 회사를 차렸으며, 불과 5년 만에 미국 최대 등반 장비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하지만 전 세계 명산을 오르다 문득 자신이 만든 장비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철로 된 피톤 생산을 중단하고 ‘클린 클라이밍’ 운동을 시작한 이유다.
자연보호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결국 바위를 훼손하는 피톤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의류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1973년, 35세 때 파타고니아를 창업한 것이 그것이다. 돈을 벌되 환경을 해치지 않는다는 캠페인이 기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쉬나드는 성공한 사업가에 그치지 않고 자선 사업가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파타고니아의 소유권을 자연보호를 위한 신탁재단과 비영리 단체에 귀속시킨 것이다. 그는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존경스러움이 절로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