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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Nov 20. 2021

<18> 절망에서 희망 찾는 법

일이나 공부에 몰두하기, 종교 갖기, 일기 쓰기, 마음 비우기

“만약 신독(愼獨)하여 하늘을 섬기고, 힘써 용서(容恕)를 실천하여 인(仁)을 구하며, 또 항구하게 쉬지 않을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이다.”

-다산 정약용의 ‘심경밀험(心經密驗)’


명문가(아버지 진주 목사 역임) 출생, 22세 진사과 합격, 28세 문과 장원 급제, 30세 사헌부 지평, 33세 경기지역 암행어사, 34세 병조 참의, 35세 좌부승지, 38세 형조참의.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경세가 다산 정약용의 전성기 이력이다. 눈에 띄게 총명한 데다 성정이 반듯해 진사과 합격으로 성균관에 들어가자마자 개혁군주 정조의 눈에 쏙 들었다. 39세 때 정조가 승하할 때까지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 집안은 졸지에 폐족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기나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을 당했고, 둘째 형 정약전도 자신과 함께 유배길에 올랐으니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서울에서 800리, 전남 강진읍내 허름한 주막집 뒷방에서 보낸 귀양살이 첫날밤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마흔 인생에 사실상 처음 겪는 수난인 데다 서울에서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유배생활은 무려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쓰러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을 다잡고자 했다. 틈만 나면 송나라 진덕수가 편찬한 ‘심경(心經)’이란 책을 손에 들었다. 사서삼경 등 유학의 여러 경전에 수록된 마음 수양법을 발췌하여 정리한 책이다. 다산은 단순히 몇 번 읽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학설을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추가해 ‘심경밀험’이란 책을 새로 편찬해냈다. 


위에 소개한 문장은 심경밀험 중 “성인이 되는 길은 배울 수 있다”라는 주자의 생각에 주석을 단 것이다. 신독과 용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다산은 심경을 탐구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심경밀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궁핍하게 일 없이 살면서 육경과 사서를 벌써 여러 해 동안 탐구하였는데, 한 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으면 설명을 달고 기록하여 간직해 두었다. 이제 독실하게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니, 오직 소학과 심경이 여러 경전들 가운데 특출하게 빼어났다. 학문이 진실로 이 두 책에 침잠해서 힘써 행하되, 소학으로는 그 외면을 다스리고, 심경으로 그 내면을 다스린다면 거의 현인이 되는 길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힘을 기울이고자 하여 경전을 궁구하는 사업을 심경으로 맺는다.”


심경과 심경밀험에는 마음 다스리는 방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전체 37편 가운데 맹자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11편이나 된다는 게 특이하다. 실제로 맹자는 마음공부를 유달리 강조했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데 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정곡을 찌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자기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찾지도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시기 질투하고, 괜히 화를 내고, 남을 욕하거나 원망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심경밀험에서 언급한 다산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자.


“중(中)은 지극히 선한 것이고 용(庸)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면서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면 중용이다. 사람이 잠시 울고 후회하며 선을 지향하는데, 이때는 그 마음이 맑아서 성인 될 기틀이지만 오직 오래도록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씻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뉘우친다는 의미의) ‘회(悔)’ 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갑자기 죄와 허물에 빠져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느낄 때 바로 점검을 해보면 재물이 아니면 여색 때문이다.”


다산은 생사가 불투명한 참담한 상황에서 격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학문과 저술을 택했다. 세속의 길에서 밀려났으니 공부에 정진하자는 생각이었다. “어릴 때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 세속의 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


언제 풀려날지 기약조차 없는 유배 시기를 ‘여가’라고 표현했으니 그의 심적 평온을 느끼게 된다. 다산은 귀양살이 7년쯤 되었을 때 해남 윤씨들이 제공한 ‘다산초당’에 자리 잡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한다. 틈틈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경전을 연구해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썼다.


다산은 아픈 마음을 잘 다스렸기에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강변 고향에서 큰 병 앓지 않고 75세까지 살 수 있었다. 부인과 회혼례(결혼 60주년 잔치)까지 했으니 당시로는 꽤 장수한 편이다.


다산학이라 불리는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의 흥망성쇠를 관통한다. 그가 비록 한반도 끝자락 시골에서 영어의 몸으로 18년을 보냈지만 결코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거뜬히 헤쳐 나온 그의 웅혼한 정신은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살다 보면 누구나 고난과 역경에 처할 수 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스러운 상황 말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불치병에 걸리는 사람, 졸지에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람, 사업체가 무너져 빛 더미에 올라앉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이럴 때 대부분 실의에 빠져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세월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일상을 회복한다. 문제는 세월이 흘러도 슬픔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역경과 곤궁은 호걸을 단련하는 도가니와 망치(채근담)라고 했지만 이런 사람에겐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통은 종교생활을 많이 권한다. 평소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에겐 기도와 명상이 곧바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변의 권유와 도움을 받아 새로이 종교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 등 고등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추구하는 교리를 갖고 있기에 당장의 고난 고통에 얽매이기보다 멀리 앞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빨리 잊기 위해 무언가 일에 푹 빠지면 좋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많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고자 쉬고 있다면 곧바로 일을 시작하라고 말한다. 지인 한 사람은 남편을 여의고 슬픔을 달래고자 절을 찾았다가, 절에서 일자리까지 얻어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다산이 유배 중 학문에 매진한 것도 같은 경우라 생각된다. 유배가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해배(解配) 후 벼슬길을 상상한다고 생각해보라. 서울로부터 좋은 소식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마 다산은 좋은 벼슬 남들 할 만큼 이미 했고, 임금 사랑도 남 받을 만큼 받았으니 이제 마음 비우고 살자, 이렇게 작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는데 일기 쓰기가 도움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가끔이라도 일기를 쓰는 사람이 더 익숙하겠지만 전혀 쓰지 않는 사람도 일기를 쓰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기 쓰기는 자신과의 대화다. 일기를 통해 지나온 날들을 겸허한 자세로 반성해 볼 수 있고, 고통스러운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평가해 볼 수도 있고, 다가올 미래를 희망으로 멋지게 설계해 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스스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최종적인 열쇠는 어차피 재기의 희망을 품는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키케로)

“희망은 삶 속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힘이며,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유진 오닐)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

<대학공의, 대학강의, 소학지언, 심경밀험> 정약용, 이광호 외 옮김, 사암, 2016

<다산 평전> 박석무, 민음사, 2014

<다산의 마지막 공부> 조윤제, 청림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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