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씽킹이 ‘필연’이 된 이유
오랫동안 비즈니스의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정밀 시계’와 같았습니다. 20세기 경영의 문을 열었던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Taylor)는 초시계를 들고 노동자의 움직임을 초 단위로 쪼개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과학적 관리법’의 시작이었죠. 인간의 노동을 수식화하고 표준화할 수 있다는 이 믿음은 이후 산업의 성경이 되었습니다.
맥킨지 같은 컨설팅 회사가 문제를 로직 트리(Logic Tree)로 분해하며 ‘정답’을 찾아낼 때, 제조 현장에서는 더 지독한 정밀함이 요구되었습니다. 모토로라가 창안하고 GE가 대규모로 확산시킨 식스시그마(6 Sigma)는 100만 개 중 단 3.4개의 불량만을 허용하겠다는,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수식적 사고의 정점이었습니다. 여기에 도요타의 린(Lean) 생산 방식은 낭비를 제거하며 시스템의 효율을 극대화했죠.
이 시절 유능한 리더란 곧 ‘가장 정교한 시계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MECE하게 구조화하고, KPI와 ROI로 모든 성과를 증명하는 것. 세상은 분석 가능한 대상이었고, 경영은 곧 정답이 있는 문제를 가장 빠르게 푸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견고하던 시계들이 헛돌기 시작했습니다. 효율성은 극에 달했는데 고객의 마음은 잡히지 않고, 숫자는 완벽한데 브랜드의 생명력은 시들어가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상이 더 이상 ‘수학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문제’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일찍이 세상의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정밀하게 예측 가능한 ‘시계(Clock)’의 영역과, 흐릿하고 불확실하며 형태가 계속 변하는 ‘구름(Cloud)’의 영역입니다.
테일러와 GE가 천착했던 ‘시계의 세계’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구름’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취향, 문화적 맥락, 집단적인 감정, 내일의 유행… 이것들은 분해한다고 해서 정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해석이 필요하고 공감이 필요하며, 때로는 논리를 뛰어넘는 직관이 필요합니다.
199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디자인 씽킹이 부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시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IDEO는 디자인 씽킹의 상징 같은 회사입니다.
하지만 IDEO가 처음부터 “창의적인 아이디어 회사”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의외로 현실적이었습니다.
제품은 충분히 기능적인데, 사람들이 안 쓴다
기술은 완벽한데, 경험이 불편하다
전략은 합리적인데, 현장에서 정착이 안 된다
즉,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용자의 맥락에 있었습니다.
IDEO가 유명해진 장면 중 하나는 “쇼핑카트를 다시 설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그 장면이 영상으로 널리 퍼지며 디자인 씽킹을 대중화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의 핵심은 ‘멋진 쇼핑카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쇼핑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불편을 찾아내고, 빠르게 실험하면서
문제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기존의 컨설팅 문법과 달랐습니다.
가설이 먼저가 아니라 관찰이 먼저였습니다.
완성된 보고서가 아니라 거친 프로토타입이 먼저였습니다.
정답을 설계하기보다, 정답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디자인 씽킹이 강조한 것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구름 같은 현실을 다루는 방법.”
그런데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과거 테일러나 잭 웰치가 그토록 갈구했던 ‘완벽한 과학적 사고’가 인간이 아닌 AI의 손에서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AI는 인류가 만든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시계’입니다. 그것은 인간보다 수만 배 빠르게 요약하고, 분석하며, 최적의 효율을 찾아냅니다. AI의 사고방식은 거침없는 ‘직선’입니다.
데이터라는 입력을 넣으면, 가장 확률 높은 결과라는 출력을 직선으로 뽑아냅니다. 식스시그마의 정밀함도, 도요타의 최적화도 이제는 AI가 훨씬 더 잘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제 ‘논리’와 ‘분석’만으로는 인간의 차별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AI가 세상의 모든 시계를 수리하고 있을 때, 인간은 다시 ‘구름’을 바라봐야 합니다.
비즈니스 역사에서 이 ‘시계’와 ‘구름’을 가장 영리하게 결합한 사례가 바로 넷플릭스입니다.
초기 넷플릭스는 ‘데이터의 제국’이었습니다. 알고리즘으로 시청자의 취향을 분석하는 그들의 방식은 철저히 시계적이고 과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세계 최고의 콘텐츠 기업이 된 결정적 계기는 알고리즘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람의 변화’라는 구름을 읽어낸 결단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는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편성표’가 아니라 ‘취향’으로 소비한다
사람들은 좋은 콘텐츠를 몰아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취향은 국경을 넘는다
오리지널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에 거액을 투자할 때, 데이터는 ‘가능성’을 말해주었지만, 그 거대한 도박을 실행에 옮긴 것은 “우리는 이제 단순한 플랫폼이 아니라 제작사가 되겠다”는 경영진의 전략적 직관이었습니다.
시계(데이터)로 기반을 닦고, 구름(인간의 욕망과 비전)으로 도약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석과 직관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씽킹의 실체입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대항해시대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15세기의 범선은 당대 기술의 집약체였습니다. 나침반, 지도 제작법, 천문 항해술은 철저히 수학과 물리의 영역, 즉 ‘시계적 사고’였습니다. 만약 나침반의 바늘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배는 풍랑 속에서 침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거친 바다로 배를 밀어 넣은 동력은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금과 향신료에 대한 욕망’, ‘국가의 위신’ 같은 모호하고 뜨거운 구름이었습니다.
차가운 나침반(시계)만 있었다면 안전한 연안 항해에 머물렀을 것이고, 뜨거운 야망(구름)만 있었다면 바다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대항해시대라는 거대한 혁신은
‘계산 가능한 기술’과
‘계산 불가능한 인간의 의지’가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결국 미래의 경쟁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I라는 완벽한 직선(시계)을 도구로 쓰되,
그 도구를 어디로 휘두를지 결정하는
인간만의 곡선(구름)을 잃지 않는 데 있습니다.
AI는 우리에게 가장 정교한 ‘수식’을 던져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식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설명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서사’입니다.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맥락을 읽고, 효율성 너머의 의미를 찾는 일. 그것이 테일러의 초시계와 AI의 알고리즘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서사를 다시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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