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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석호 Nov 18. 2024

탄신

단편소설

 사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은 꼬여 그의 어깨 뒤에서 겨드랑이를 타고 배를 올라와 다리 사이에 끼여 있었다. 서쪽을 향한 그의 단칸방에 빛이 내리 쬐여 눈이 부셨다. 하루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지점에서 그는 또 하루의 첫 실패와 마주하였다. 일찍 일어나겠다는 의지가 그가 일어난 이부자리처럼 마구 구겨져 흐트러졌다. 그는 눈 뜨자마자 또 하나의 실패를 더 맞이하였다. 아침밥을 먹겠다. 아침을 먹는 자가 성실한 자라고 생각한 그는 눈 뜬 순간부터 오늘의 아침은 영원히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어젯밤 몸을 뉘이며 상상한 일출의 신선한 햇살과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 아침에 대한 열망은 삐죽삐죽 형편없이 선 그의 머릿속에 꽁꽁 숨어 실루엣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분명 잘 만큼 잤을 텐데 그의 머리는 젖은 솜마냥 무겁다. 질척한 질감에 계획했던 것들이 다 젖어 못 쓰게 되었다. 그는 몸을 세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그의 피부처럼 붙어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을 들춰내려하니 방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추운게 가장 싫었다. 아니 뭐, 그렇게 싫어하진 않다만 좋아하진 않았다. 분명한 건 지금은 확실히 싫다고 느꼈다. 그의 삶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삐딱하게 놓인 베개를 그는 똑바로 했다. 그의 몸을 뱀 마냥 휘감아 아가리를 벌려 그를 잡아먹으려는 듯한 이불을 반듯하게 펴 덮고 그는 다시 누웠다. 똑바른 베개에 반듯한 이불, 그 안에 곧게 누운 그는 새삼 피부에 닿인 이불의 감촉이 부드러워 기분이 좋았다. 그는 킬킬하며 웃었다. 그는 손을 머리맡으로 뻗었다. 그것은 그의 망원경이자 사회이자 책이자 양식이자 교양이자 친구이자 조언자이자 애인이자 의사였다. 그는 망원경을 켰다. 서쪽에 난 창이 전부인 그의 집에서 그는 망원경을 통해 동쪽 나라를 보았다. 또 서쪽, 남쪽, 북쪽, 연예인, 가수, 방송인, 운동선수, 정치인 부지런히도 손가락을 놀려 여행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개인 방송인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들은 그 보다 못생겼으며 그보다 무식하며 욕도 먹으며 비웃음을 샀다. 그는 반듯이 누운 채 또 킬킬 웃었다. 그가 다음으로 보기 좋아한 것은 정치인들이다. 하나같이 그 보다 늙은 자들이 나타나 그가 보기에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고 화나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즐거운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인들을 볼 때면 어떤 때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물론 반듯하거나 아닌 채로 누워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의 눈에 내리쬐는 볕이 자신의 머리를 지나 머리 위를 비출 때까지 신통한 망원경의 조리개를 돌려 세상을 탐닉했다. 그러다 배가 오목해지는 느낌을 지나 먹먹한 굶주림이 그의 배를 눌렀을 때 그는 일어섰다. 이불은 오랜 친구를 잃어버려 그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그 모습은 굴이나 파충류의 허물 같기도 하였다. 그는 세 걸음을 걸어 냉장고에 갔다. 냉장고엔 그를 꼭 닮은 음식들이 드러누워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청소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 뒤, 냉장고를 그대로 닫았다. 그리고 찬장을 뒤졌다. 알밤 마냥 5개의 알을 꼭 품고 있었던 라면 묶음의 껍데기만 수북한 찬장엔 그의 기가막힌 절약적 생활로 오늘의 양식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싱크대에 붉은 액체를 머금고 있는 냄비를 비우곤 물로 잔여물을 손으로 슥슥 밀어내곤 그의 신통한 물건에서 몇 번이고 배우고 토론하고 전수받은 기술을 통해 물을 담아 가스렌지 불을 켰다. 그는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불을 켜자마자 그는 물건을 통해 또 새로운 정보를 탐닉했다. 그의 목과 등은 무수한 배움으로 굽어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짬짬이 자신의 일용한 양식의 제조과정을 수행하고, 다시 물건을 들어 배우는 것을 근세철학자가 보았다면 분명 경탄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의 양식이 식탁에 놓였다. 이 양식은 그가 며칠을 먹었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먹은 것이었다. 그의 혀는 이 양식의 조그만 부분만이 들어와도 마늘의 맛과 고춧가루의 맛, 돼지뼈 혹은 돼지고기 가루 등을 모두 유추해낼 수 있을 만큼 많이 먹었다. 하지만 그는 철인처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양식이란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한 혈당의 회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그는 빠짝 말랐지만 눈은 형형히 빛나는 수도승이었다. 그의 번뇌가 가득 찬 한 칸 남짓한 공간은 어쩌면 토굴이나 수도원이었다. 그는 금세 단촐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쪽 너머 세상이 점멸하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지금 수도승의 맑은 눈에는 무엇이 담기고 있을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이제 두 걸음 만에 책상에 도착해 앉았다. 그리고 신성하여 그 어떤 흠이나 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경전을 조심히 앞에 놓았다. 하지만 역시 철인이자 깨우친 수도승에게 교리라는 것은 고리타분한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교리에서 채울 수도, 교리에 담을 수도 없었다. 그는 마치 지장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세상과 잇닿는 물건을 쥐고 분별없이 중생과 토론하고 법회를 열었다. 그가 열중하는 새에 하늘엔 벌써 별이 빛나고도 한참이 지났다.

 그의 숭고한 업무가 끝났을 적엔 새벽이 되었을 때였다. 그에겐 다시 다가올 하루를 위한 양식이 필요했으므로 허름한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엔 사람이 꽤나 많았다. 아마 거리에 술집이 많아 그런 것일 것이다, 젊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중년 또한 삼삼오오 앉아 술과 음식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어느 무리는 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 무리의 눈빛은 오만하고도 경쾌했다. 분명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 그에게도 그런 생활이 있었으리라. 화려하고 밝은 거리가 그리운 듯 그의 슬리퍼는 아스팔트 바닥을 적적 핥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를 부르는 큰 고함이 들렸다. 그가 멈춰 고개를 돌리자 이윽고 다시 그 고함이 울려 퍼졌다. 끔찍한 비명같은 고함 소리. 그리고 급작스레 쏟아지는 번쩍이는 빛. 그는 털이 곤두서듯 움츠렀다. 그는 도망치듯 튀어나가 상점으로 갔다. 그리고 양식을 사곤 낭비하는 걸음없이 집 현관에 들어섰다.

 간만의 움직임 탓인지, 강렬한 빛깔에 의한 흥분인지, 자극적인 향기에 대한 설렘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소리 때문인지 그의 가슴이 조금 뛰었다. 하지만 천천히 움직여 굳게 닫힌 문 뒤로 복도의 빛은 사라졌고 그의 토굴은 암흑 속에서 가로등 빛만이 슬쩍 들이쳤다. 이상한 기분에 그는 현관문에 기대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두근거림과 알 수 없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동공이 어두운 방 안에 적응해 크기를 확장할 쯤에 그는 눈에 맺힌 방의 상을 보고는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다리로부터 척추를 타고 마비되듯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질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나갈 듯 문고리를 찾았다. 커다란 거미가 벽을 더듬는 듯한 소리. 어둠 속에서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을 찰나에 그는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 힘을 내어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식탁 위 식사를 하고 그대로 놓인 냄비 옆에 양식을 놓곤 세 걸음 만에 자신의 침대로 달리듯 갔다. 콘센트의 빈구녕 마냥, 뱀이 벗은 허물 마냥, 동굴 같은 이불에 그는 다시 몸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그의 심장은 조금씩 리듬을 되찾았고 뻣뻣하게 타고 올라오던 느낌들도 따뜻한 물에 들어온 듯 녹아 팔다리가 자유롭게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반듯이 누워있었으나 안정이 되자 이내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좌우로 뒤척여 편한 자세를 찾으려했다. 그가 모로 누워 다리와 팔을 구부려 팔꿈치와 무릎이 닿을 정도로 웅크렸을 때 마침내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여 물건을 꺼내어 쥐곤 단전 앞에 놓여있던 검은 선을 뽑아 들어 연결시켰다. 그의 방안에 편안한 숨이 도는 것 같았다. 바깥 거리의 소리가 막에 가려져 웅얼거리는 소리 정도로만 들렸다. 그는 따뜻했고 부드럽고 평안했다. 그의 방에 가벼운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거리에서 보였던 다채로운 빛이 그 신통한 물건에서 밝게 그의 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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