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바닥난 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것들

by KELLY

모니터의 커서만 깜빡인다. 머릿속을 탈탈 털어봐도 먼지만 날릴 뿐, 쓸 만한 이야기가 단 한 줄도 떠오르지 않는다. 잔다르크부터 라면까지, 거창한 역사와 일상의 해학을 넘나들며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일까. '주제 고갈'이라는 막다른 길에 서니, 글 쓰는 재능이 여기까지인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나는 안다. 화려한 꽃들이 다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무의 옹골찬 수형이 보이듯, 쓸 거리가 없어진 이 막막함이야말로 진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것을.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갈증


우리는 늘 무언가 특별하고, 통찰력 있고, '좋아요'를 부를 만한 기깔나는 주제를 찾아 헤맨다. 남들이 모르는 지식을 뽐내거나, 누군가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들 반전을 설계하려 애쓴다. 주제가 바닥났다는 느낌은 사실 '남들에게 멋져 보일 소재'가 떨어졌다는 뜻에 가깝다.


하지만 진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정보가 아니라, 누구나 겪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함의 재발견'이다. 오늘 아침 무심코 신은 짝짝이 양말, 퇴근길 지하철에서 본 이름 모를 사람의 뒷모습, 혹은 주제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지금 이 순간의 솔직한 고백. 이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공감의 재료가 된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글쓰기


주제가 바닥났다면 이제 고개를 숙여 발밑을 볼 차례다. 거창한 시대정신이나 위대한 인물을 논하는 대신, 내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에게 말을 걸어보자. 10년째 버리지 못한 낡은 티셔츠, 물 주는 걸 깜빡해 시들어가는 화분, 냉장고 구석에서 화석이 되어가는 정체불명의 반찬통.


이 보잘것없는 것들에도 저마다의 서사가 있다. 그것들에 감정을 이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세상은 다시 쓸 거리로 가득 찬 거대한 도서관이 된다. 주제는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해상도를 높여 '발견'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상태를 즐기는 여유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억지로 쥐어짜기보다 잠시 펜을 놓고 '관찰자'가 되어보는 것도 좋다. 주제가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새로운 경험과 감정을 채워 넣을 여백이 생겼다는 뜻이다. 텅 빈 마당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듯, 무방비 상태로 세상을 마주할 때 예상치 못한 영감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주제가 바닥났다고 괴로워하는 작가님들이여, 축하한다. 당신은 이제 비로소 가짜 포장을 벗겨내고, 가장 투명하고 정직한 당신만의 문장을 쓸 준비가 되었다. 오늘 밤,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그 막막한 심경을 단 한 줄이라도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다음 베스트셀러의 첫 문장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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