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라 길을 나선 자가 느낀 시간 한 조각
11월 20일 목요일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집을 나선다. 목요일에 일상적으로 가는 장소와는 낯선 방향의 길이다. 3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서향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움직이지를 않고 있다. 나는 미지의 시간을 향해 설레며 한적한 길로 가고 있는데, 저들은 각자의 생업을 위해 정체의 시간을 겪고 있다. 모두 아침 일찍 길을 나섰는데 도로 상황은 가는 방향만큼이나 다르다. 저들에게 오늘 하루가 평온하길 ‘청원’했다.
영월을 향해 가는 동안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희망한다. ‘출발 FM과 함께’를 듣는다. 아침마다 듣기 좋아하는 클래식 방송이다. 가을 낙엽이 가득한 시기답게 어느 청취자가 “노랗게 깔린 은행 단풍에서는 쓸쓸하면서 포근함이 느껴진다”라고 문자를 보냈나 보다. 진행자는 은행나무 노란색을 언어로 표현할 때 뭔가 조금 부족한 듯 아쉬움을 느꼈었는데, “쓸쓸하면서 포근함”이 그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고 깊이 공감하면서 문자를 보낸 이의 이름과 함께 감사를 표한다. 청취자가 보낸 한 줄의 문장에 마음을 공명하면서 감사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서로 소통하는 아나운서 이재후가 부럽다.
“누군가의 ‘청원’으로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있을 수 있는 거겠죠?”
진행자가 오늘의 풍족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낮게 깔린 구름을 배경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기온은 3도. 햇볕을 가린 짙은 구름은 곧 눈을 뿌릴 듯한 분위기다. 도롯가에서 늦은 여름까지 아이보리색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붉나무가 갈색의 나무들과 같은 색으로 잘 어울리고 있다.
지금 8시 30분, 집에서는 아내와 딸이 16개월의 손자 등원을 준비하며 식탁과 거실과 방을 분주히 오가고 있을 터이다. 나는 망경산사를 향해 길을 나선 지 한 시간여 만에 이미 겨울 산에 부는 바람만큼이나 먼 곳에 있는 것 같은데, 그들에게는 멈춘 듯한 시간의 평범한 일상이겠지.
산굽이가 깊어지고 높아진 치악휴게소에서 차 한잔 하며 한숨을 돌린다. 낙엽 진 산등성이에 빛이 들어와 땅의 등성이와 나무의 우듬지 등성이가 만든 두 줄이 산맥을 따라 나란히 달린다. 잎을 덜어내자 보이지 않던 선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무엇을 들어낼 수 있을까.
망경산사에 이르는 마지막 길은 말티고개 같은 꼬불길이 6Km나 이어지는데, 마치 필 듯 필 듯하면서도 꽃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변산바람꽃을 닮았다. 그 길 끝에 절이 있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사위가 고요하고, 애틋하게 낯선 향기를 머금은 서늘한 공기가 가득하다. 한 사람이 말라버린 화초 대 등속을 정리하고 있다.
“일하러 왔는데 어디로 가야 스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의 안내로 찾아간 곳은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휴식하는 건물 뒷공간이었다. 요란한 파쇄기 앞에서 자그마한 스님이 나뭇가지를 기계에 넣고 있다. 인사를 하자 눈을 들어 반가이 맞아주시는데 그때 그 스님이다.
‘맑고 향기롭게’에서 주관한 올해 마지막 ‘10월 산사기행’ 때 이곳에 처음 왔었다. 800여 미터 높이의 산자락에, 가늠할 수 없이 넓게 펼쳐진 산자락을, 우리 산에서 자라는 야생초가 가득한 식물원처럼 만들고 가꾸는 이들이 단 세 명의 비구니라는 걸 와서야 알았다. 나는 경이에 차서 절 마당을 바지런하게 아니 분주하게 움직이던 한 스님께 물었었다.
“이 넓은 곳을 어떻게 다 관리하세요?”
“그냥 해요”
그때 이미 나는 이곳에 다시 와야 한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갑을 끼고 그 스님이 하던 일을 이어받았다. 낯선 향기가 주변을 새벽안개처럼 감싸고 있다.
“마가목 나무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말려서 차로 먹으면 관절에 좋아요. 꽃의 향기도 좋은데 이 향기와는 좀 달라요.”
파쇄된 마가목이 칸칸이 들어간 건조기에서도 그 향기가 난다.
‘풀냄새 같은데 좀 더 맑고 상큼하여 여운이 오래가는 향기’
마가목 편을 건조기에 넣기 위해 쟁반에 담으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듣는다. 25년 전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 비구니 세분이 들어와 손으로 땅을 일구고, 심고, 가꾸고, 만들고, 불사를 하면서 쌓인 시간이 마가목 향기를 타고 바람처럼 무심히 펼쳐졌다. 자그마한 몸매와 조근조근한 말투, 바지런한 몸놀림이 내 어머니의 모습으로 겹쳐졌다.
점심공양 시간
스님 세 분이 둥그런 상에 둘러앉고, 보살 한 분, 자원봉사 부부, 그리고 내가 쌍둥이 같은 둥근 상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깻잎 절임, 김치, 우슬 나물, 눈개승마 나물, 두부조림, 생배추, 된장찌개,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양배추 가루가 들어간 연녹색 밥.
다른 상에서 드시는 스님들을 곁눈으로 바라본다.
“이 거사님이 이곳에서 용담과 거기에 사는 벌을 보았는데, 벌이 꽃 속에서 잠을 잔다네요”
함께 일했던 스님이 내가 말한 용담과 좀뒤영벌의 공생을 전하자, 상좌에 앉은 소녀같이 투명한 피부의 스님이 눈을 반짝인다.
“그렇단 말이지요. 나는 몰랐네. 아침에 벌이 나오는지 꽃을 톡톡 건드려 봐야겠네”
한겨레 21에 있는 허태임의 용담 관련 글을 찾아드렸다.
“초록색 잎을 배경으로 트럼펫을 닮은 푸른 보라색 통꽃 대여섯 송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피는 용담. 짙은 파랑과 보라 사이, 좀처럼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강렬한 색감과 빛깔이다.”는 허태임의 글을 읽더니
“나는 용담의 오묘한 꽃 색깔을 한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이 작가도 그랬던지 풀어쓰셨구나”
분명히 밭일을 법당일 보다 훨씬 많이 하셨을 텐데 손이며 얼굴 피부가 저렇게 고우실까.
오후에 외발수레를 끌고 오가피 수확에 나섰다. 그 길에 지난번 보았던 멋진 버드나무가 잎을 떨군 채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반갑다. 나무 아래를 파랗게 덮은 파드득은 아직 푸른 잎을 유지하고 있다. 오가피 열매를 따다가 어느 시간이 지나고 문득 돌아보니 바람 부는 오가피 언덕에 혼자 있다. 같이 수확하던 스님은 일 보러 내려가셨나 보다. 가시가 없는 관목이지만 빽빽한 가지 사이의 높은 곳에 달린 열매는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고 엉킨 가지가 모자를 내동댕이치고 목과 얼굴을 스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확한 두 박스의 오가피를 외발수레에 싣고 내려간다. 날이 저무니 내려오라는 스님의 전화를 받은 후이다. 절집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지. 건조기에 마가목을 넣을 때 오가피 열매도 함께 건조되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곳으로 갔다. 언제 왔는지 바지런한 스님이 나타나 오가피 열매를 건조기가 있는 창고로 함께 옮긴다.
“많이도 수확하셨네요”
겨울에 접어든 어느 날. 어린 나는 뒷산에 올라 소나무 갈잎, 마른풀, 나뭇가지 등속을 긁어모은다. 땀을 흘리며 지게에 가득 싣고 마을로 내려갈 때는 내 안에서 기쁨이 솟았다. 이 땔감을 지게에 지고 집에 들어서면, 까만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환히 웃으며 칭찬하실 거니까.
“아이고 장해라. 마이도 해왔다이.”
스님의 칭찬이 어머니 목소리와 또 겹쳤다.
수확물을 수레에 싣고 절로 내려올 때부터 나는 그 말을 기대한 듯하다. 오가피를 따오는 나를 누군가가 봐주길 바라며 돌아오는 길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던가.
칭찬은 관심이 만든 길이다.
숲길은 너무나 어두워서 무엇인가 막 튀어나올 듯하여 머리칼이 쭈뼛한다. 일부러 신발을 끄는 소리를 내며 걷는다. 원시의 어둠이다. 저 어둠에서, 저 어둠을 배경으로 우주도, 생명도 탄생하였다. 바람은 산속의 나무와 빠르게 이야기하는 듯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총총하다. 야간 모드로 찍은 사진에는 잎을 모두 드러낸 나무의 가지마다 반짝이는 별들이 내려앉아 있다. 겨울나무가 매서운 추위에도 의연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밤마다 별들이 내려와 친구가 돼주기 때문일듯하다. 우주의 별들을 친구로 두면 누구든 의연해질 수 있지.
식물을 친구로 두면, 사소한 곳에서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데 하물며 우주의 별을 친구로 두면 삶의 의미가 깊어지지 않겠는가. 별을 보러 나간 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나뿐인 듯하다.
적막한 외로움이 몰려온다. 그 외로움이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