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것들

- 시간을 밟고 27화

by 금희

“이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차라리 서빙을 하는 게 어때요?”
여자는 시계를 흘끗 보며 미간을 좁혔다. 피곤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지금 당장은 없지만, 자리가 나면 연락할게요.”

사무실 창밖으로는 말 냄새와 흙먼지가 뒤섞인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수잔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는 여자의 눈이 잠시 곤혹스럽게 머뭇거렸다.

“디시워셔 경험이 있다고요?”
“네. 2년 정도요.”
“하지만 여긴 경마장 레스토랑이에요. 웬만한 남자도 오래 못 버텨요. 매일이 전쟁터나 다름없어요.”

수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작고 몸은 앙상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할 수 있어요.”
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꼭 그렇게 원한다면… 내일부터 한번 나와봐요. 주 3일, 일해보고 결정하죠. 15달러부터 시작해서 한 달 후엔 16달러로 인상해 줄게요.”

승낙이 떨어지는 순간, 수잔의 입가에 비로소 작은 미소가 번졌다.




제임스와 헤어진 지 한 달.

처음부터 그가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가 떠난 집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은 벽을 타고 울리는 세상의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식탁에서도, 거울 앞에서도,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눈물은 흘러내렸다.
언제 멈출지 모를 빗물처럼.

사랑을 몰랐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공허는 과거의 어떤 고통보다도 더 깊었다.
잠시라도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숲속 집을 걸어 잠그듯 문을 닫았다. 그렇게 짐을 꾸려 길 위에 올랐다.



첫 여행지는 나이아가라 폭포였다.

한때, 사고로 끝내 가지 못했던 곳.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의 한복판에서 수잔은 잠시 미아가 된 듯 홀로 서 있었다. 폭포는 하늘의 물줄기를 한꺼번에 쏟아내듯 위엄을 과시했다. 주변의 모든 소리를 삼키며 부딪히는 물방울 속에서 제임스의 얼굴이 어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이별의 상처 때문일까.
왜 이곳에 오고 싶었는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와 흩날리는 웃음소리가 사방을 메우는 순간 세상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 멍해졌다.
커다란 시계와 작은 시계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서로 맞물리듯,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래전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이제, 그만.”

카메라 셔터소리를 지우듯 차갑게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고.
그 어떤 흔적도 기록하지 않겠다고 되뇌며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흘려보내듯 천천히 뒤돌아섰다.

뉴욕.

무작정 국경을 넘어 도착한 도시.
신문지를 덮고 잠든 사람들, 낡은 담요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거리의 삶.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충직한 개. 골목 어귀에서는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긴 선율이 허기를 달래듯 이어졌다.

그 앞에서 수잔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폭포보다 더 깊이 그녀를 흔든 것은, 바로 이 애잔한 음과 삶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뒤, 풍경은 전혀 달라졌다.
쓰레기 더미와 마약에 지친 사람들이 서 있던 거리의 끝에서, 빛나는 쇼윈도가 나타났다. 고급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쇼핑백을 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단
몇 블록 차이인데,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뉴욕의 빛은 찬란했지만, 그만큼 어둡기도 했다. 그녀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낯선 도시의 숨결은 거칠었고, 눈부신 불빛은 오히려 눈을 멀게 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조차 유리조각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더 깊이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도시의 심장부에 닿기도 전에,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
결국 도망치듯 차를 돌렸다.
뉴욕의 불빛이 뒤로 멀어지자 조금씩 숨이 다시 트이는 듯했다. 도로 위에 홀로 남은 차창 밖으로는 끝없는 어둠과 스쳐 가는 마을에서 소리 없이 반짝이는 불빛만이 작별하듯 깜박였다.

그녀는 다시 록키 산맥을 향해 출발했다.
숲과 바위, 그리고 바람의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무엇인가를 갈구하면서도 또 저만치 밀어내는 상처받은 마음이 길을 잃고 떠돌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멀리서 깜박이는 조명이, 문득 흔들리는 기억과 겹쳐졌다. 그 빛을 항해 날아든 불나방 한 마리가 운명을 예감하듯 날개를 떨었다. 이 밤은 유독,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아련한 것들로 가득하다.
여행의 끝에서 언젠가는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삶의 목적지를...
수잔의 여정은 그렇게,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