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던 것들

-시간을 밟고 28화

by 금희

프롤로그 - 지훈의 기억

제임스 옆에 앉은 수잔이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하지 않았던 미소.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자꾸만 거슬러 올라왔다.
그 기억은 언제나, 그날의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멈췄다.

만약 그때, 그녀를 껴안았다면,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오래도록.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그리고…
결혼한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반달은 여전히, 곡예를 하듯 아슬하게
전깃줄 위에 걸려 있었다.


어떤 생은 마치 흩어지는 아지랑이 같다.
밟히고 뽑혀 사라져도 흔적 하나 남지 않는 삶.
그럼에도 숨 쉬는 동안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했지만, 결국 돈이 삶의 모양을 결정했다.
가난한 방랑자의 유랑은 겉보기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한 끼를 아끼며 빵과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어떤 날엔 차 안에서 밤을 견뎌야 했다. 스며드는 밤공기는 서늘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숲의 소리는 오싹하기까지 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면 새벽의 냉기가 뼛속 깊이 스며들어 현실을 잊지 못하게 했다.

처음 집을 떠날 때는, 그저 제임스의 기억을 잊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보내기도 전에 마음은 다시 현실 앞에서 조급해졌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조차도 어쩌면 사치였을까.
숲속 집에는 갚아야 할 모기지와 세금이 남아 있었고, 일을 멈춘 채 떠난 여행은 통장의 잔고가 줄어드는 순간마다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
결국 멈춰 선 마을마다 신문의 구인란을 뒤졌다.
그러다 경마장 레스토랑에서 디시워셔 모집 광고를 본 수잔은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잠깐 서빙 일을 떠올렸지만, 경마장에서 깃털 장식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웨이트리스들을 보자 곧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시급 15달러.
디시워셔치고는 꽤 높은 급여였다.
‘얼마나 고된 일이길래 15달러나 줄까?’한 편으론
내일 출근이 두려워졌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거나 화원에서 풀을 뽑아도 시간당 8달러 벌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견뎌내야 한다는 결심이 다시 굳어졌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남의 일은 늘 쉬워 보였지만, 막상 내 일이 되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대한 국솥은 그녀 키의 절반이나 되었고, 주걱은 삽보다 무거웠다.
온몸의 작은 근육 하나까지 총동원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도구들.
경마장의 먼지와 함성, 부엌의 연기와 쇳소리가 서로 맞부딪히며 극을 이루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자 머릿속은 어느새 비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몸은 시간에 비례하며 무거워졌다.


그곳에서 성격 좋은 얼굴의 마이클을 만났다.
예순이 넘은 그는 이 일을 벌써 서른 해 가까이하고 있었다.
경마장이 열리는 여섯 달 동안은 일하고, 나머지 여섯 달은 실업급여로 지낸다 했다.
아이들은 모두 독립했고, 아내와는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다고 소박하게 웃었다.

마지막 휴일, 그들 부부의 초대로 저녁을 함께했다.
트레일러 앞마당에는 작은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바람에 울리는 풍경 소리가 숲 속 집을 떠올리게 했다.
식사 자리에서 부부는 오지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티격태격했다.
“호텔은 안 가고 길 위에 텐트를 치고 자라더니, 밤새 받은 흙탕물을 아침에 마시라고 내밀지 뭐야.” 아내가 혀를 차며 웃었다.
마이클은 허클베리 핀 같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말했잖아, 고생할 거라고. 그런데 당신이 굳이 따라온 거지. 내겐 여행이란 그런 거야. 편하려면 집에 있어야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잔은 마음속에 풍경을 그렸다.
길 위의 고난의 순간에도 살아있음을 놓치지 않는 얼굴들.

그들 부부가 싸준 사과파이를 들고 돌아오는 길, 수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방에 들어선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하나가 동안의 열기를 토해내듯 잎을 떨구며 창을 스쳤다.
어린 시절 노을과 닮은 빛이었지만, 더 이상 외롭거나 두렵지 않았다.

밟히고 잊혀도 다시 일어서는 들풀처럼,
가끔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려도 자신이 선택한 색과 모양으로 살아가는 의지.
그 모든 것이 수잔에게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자유였다.

시원한 밤공기가 창틈으로 스치자,
수잔은 삶이 천천히 시간 위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