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밟고 29화
“한국 생활은 어땠어?”
태오는 머뭇거렸다.
“괜찮았지. 왜 그래, 표정이?”
수잔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지만, 동생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외국에 살며 부모 곁을 지키지 못하는, 하나뿐인 아들의 무거운 짐.
“누나가 부모님 곁에 있어 다행이야.”
태오는 오래 묻어둔 마음을 꺼내듯 조심스레 내뱉고는 시선을 떨궜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를 돌보는 누나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보낸 10년을 뒤로하고 중년의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고국 생활이 어찌 꽃길이었을까. 누나의 눈동자에 스민 슬픔이 새삼 자신 때문인 듯 느껴지며 아팠다.
수잔은 잠시 손을 멈추고 동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희끗해진 머리, 깊어진 주름. 언젠가부터 그는 개구쟁이 소년이 아닌, 세월과 책임을 짊어진 가장으로 서 있었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태오는 늘 앞서 있었다. 키도, 체격도, 성격도. 그 활달함 덕에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몸이 약했던 수잔은 그런 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얄밉기도 했다.
“나도 아버지 자전거 탈 거야.”
태오는 어느 날부터 아버지의 보물 같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다.
“누나는 못 타. 이건 남자만 타는 거야.” 의기양양한 목소리.
억울했던 수잔은 저녁 무렵, 발조차 닿지 않는 페달을 밟으며 몰래 자전거에 올랐다. 그러나 곧 무거운 자전거에 깔려 넘어지고, 무릎은 까졌다. 아픔보다 서러웠던 건 꾸중하는 부모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의 모습이었다. 그날 흘린 눈물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둘 다 중년이 되었다. 부모의 지극한 아들 사랑에 서운함을 느낀 적도 많았지만, 그 감정들은 이미 오래전에 시간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누나, 그건 알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바로 누나야.”
태오는 서류 더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흔들며 장난스레 윙크했다.
록키산맥. 검은 말 등에 올라 어색한 포즈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수잔.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래전 말타기 체험을 할 때,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온몸이 뻐근하고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간. 그러나 그 사진은 유일하게 남은 기록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여행의 기억조차 지금은 희미해졌다. 그 순간 자유로웠던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진 시간 같았다.
태오가 집으로 돌아간 뒤, 수잔은 거실 한편에 세워둔 슈트케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국으로 떠날 때도, 이곳에 올 때도, 어떤 순간에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세월은 바람처럼 스쳐갔다.
힘겹던 순간도, 아팠던 마음도, 설레던 눈빛도, 시작조차 두려워했던 날들도, 끝내 부서져 버린 사랑까지도.
그러나 낮과 밤이 멈추지 않고 반복되듯, 모든 순간은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조각들이었다.
수잔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지나간 아픔과의 작별 같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누나, 어제 집 보러 온 사람이 매매하겠대.”
“그래? 생각보다 빠르네. 잘됐네.”
“그러게. 값도 안 깎고. 아, 참—한국인이야.”
“한국인...? 누구?”
“누구라 하면... 누나가 알아? 김... 뭐더라... 훈?”
순간, 수잔의 눈이 커졌다.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김... 지훈?”
“응. 어? 누나가 어떻게 알아?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냥... 조금.”
태오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진행해도 되지? 누나 위임장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할게.”
“태오야, 잠깐만. 그 사람... 결혼했대?”
수화기 너머로 태오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나, 내가 그런 것도 알아야 돼? 뭐야, 물어봐 줄까?”
“아니야. 그냥... 됐어.”
김지훈.
그 이름이 다시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가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니.
게다가 그가 이 집을 산다고?
믿기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이름이,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을 다시 흔들어 깨웠다.
수잔은 핸드폰 화면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 이름 하나가 삼켜 버린 공기.
멈춘 것은 시간일까, 아니면 마음일까.
돌아갈 길을 잃은 듯, 하늘엔 어둡게 깔린 구름 사이로 반달이 흔들리며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