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사랑에게

- 시간을 밟고 26화

by 금희

거짓 없는 사랑은, 어쩌면 이미 거짓이었다.
사랑이 시작되면 우리는 자주 침묵을 진실인 양 내민다.
말하지 않은 말, 미뤄둔 대답, 전하지 못한 과거들.

그가 아파트에 잠깐 들르겠다고 했을 때,
수잔은 차에 그대로 남아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날엔 주차를 하고 그의 아파트로 같이 들어갔지만, 오늘은 왠지 차에 남고 싶었던 건, 어쩌면 본능이 먼저 알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차라리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한참이 지나 사이드 미러의 작은 유리사이로 아파트에서 나오는 제임스가 비쳤다.
그의 얼굴엔 수잔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한 여인이 그를 따라 나왔다.
그녀는 그의 팔을 붙들었고, 그 뒤를 어린 여자아이가 팔랑이며 따라 나왔다.

제임스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경직된 어깨가 조금씩 움찔거렸다.
여자가 그를 향해 소리쳤고, 또 사정하듯 울먹였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그의 손목을, 작은 아이가 꼭 붙잡았다.

그 순간, 수잔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제임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다른 가족이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제임스가 차에 올라탔다.
수잔은 그를 보지 않았다.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그는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그녀가 뭘 원해요?”
수잔은 생각보다 차분한 자신의 목소리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다시… 합치자고 해. 아이가 날 찾는다고.”그의 목소리가 잠겼다.
‘아이.’ 그 말에 수잔은 잠시 멍해졌다.

“당신이 원한다면, 난 이혼할 거야.”

내가 원한다면?
그럼, 당신은?
제임스, 당신은 뭘 원하는데?

수잔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자신이 이혼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광산에서 일한다고 했고, 여섯 살 난 딸이 다른 도시에 살고 있다고 했었다.
그랬다.
그는 분명 이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잔은 스스로 믿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이미 정리된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자신은 속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건 너무 참담했다. 너무 바보 같고, 너무 가여운 사랑이었다.

제임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떨렸고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녀에게 애인이 있었어. 홀연히 떠나더니, 이제 와서… 아이 때문에 다시 돌아왔대.
하지만… 오래 못 갈 거야. 결국 또 떠날 거야.
그러니까, 나를 기다려주면 안 될까?”

수잔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
쉽게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
그럼에도 자신의 꿈을 놓지 못하는 사람.
어쩌면, 수잔 자신과도 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이라니…
수잔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선택을 넘겼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이혼할 거야.”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가 선택권을 주었다는 건, 자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마음 한편이 어지럽게 남았다.
그가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족을 정리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건 무얼까?

며칠 뒤, 수잔은 마트에서 그들을 마주쳤다.
제임스와 아내, 그리고 아이가 함께 웃으며 장을 보는 모습.
아내가 장난스럽게 그의 팔을 붙들고, 제임스가 미소 지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믿어보기로 한 마음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찢어진 마음이 활활 치밀어 올랐다.
가슴속 기대와 상실감이 뒤엉키며 눈앞이 흐려졌다.
결국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보기 전에 황급히 마트 밖으로 나와 집으로 달아났다.


수잔과 제임스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했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당신을 믿고 싶지만… 당신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임스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미안해. 널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나도 혼란스러워. 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어. 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수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혼란? 그럼 난?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하긴 한 거야?”

순간, 억눌러온 감정이 터졌다.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처, 배신감, 사랑의 갈망이 뒤엉켜 두 사람은 격렬하게 부딪쳤다.

문이 닫히자, 수잔의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듯 울렸다.
제임스의 차가 몇 번이나 시동을 걸었지만 그녀는 붙들지 않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무거운 공기만 남았다.
수잔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수잔은 늘 그래왔듯 혼자였다.

제임스가 없는 집은, 그가 처음부터 이곳에 속해 있던 것처럼 빈자리를 드러냈다.

수잔은 무엇인가 잊어야 할 때 자신을 일 속으로 밀어 넣곤 했다.

땀을 흘리고 숨이 차게 몸을 혹사시키고 나면, 슬픔이 달아났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자를 덥어 쓰고, 장갑을 꼈다. 하지만 그 장갑조차도 제임스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수잔은 장갑을 벗어 거칠게 내던졌다.

“뭐가 이래, 이게 뭐야.”

참았던 아픔이 무너진 듯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억눌러왔던 설움이 목구멍을 찢고 쏟아졌다.

소리 내어, 숨이 찰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 아이의 아버지를 뺏을 만큼, 내 사랑은 절실한가?

두 사람의 재결합을 막을 만큼, 내 사랑은 단단한가?


수잔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자신에게도, 제임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저녁, 제임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잔, 잠깐 만나자. 내가 갈게.”

수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라리 묻지 말고 그냥 와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문 앞에 나타났다.

여위어 있었고, 수척한 얼굴이었다. 처음 본 고통에 찬 눈빛.

수잔은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이 먼저 그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이 아픈 사랑을 놓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그가 자신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임스를 믿어보기로 했던 순간조차, 결국 자신이 먼저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잔은 받아들였다.


그들은 아픈 사랑을 했다.

눈물 섞인 그의 숨결이 수잔의 목덜미를 스쳤고,

남긴 손끝은 이루지 못한 애절함으로 떨렸다.

마지막을 예감하듯,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