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밟고 24화
일은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제임스는 그녀가 망치를 거꾸로 든 건 아닐까,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비닐하우스 짓기’는 이제 골칫덩이 과제처럼 보였다.
처음 목공소에서 나무를 자르고 자재를 옮길 때만 해도 수잔은 햇살을 머금은 작은 텃밭에서 앙증맞은 토마토와 고추가 자라날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었다. 하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손바닥은 부어 물집이 잡히고, 비닐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못은 삐딱하게만 박혔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제임스가 곁을 어슬렁거리며 잘 돼 가냐라고 묻곤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괜찮아요였다.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엉망이 되는 듯한 현장 앞에서, 그녀는 매번 한 번도 제대로 써 본 적 없는 톱이나 망치를 움켜쥔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임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묘하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비쳤다. 땀에 젖은 얼굴로 끙끙거리며 못 하나에 매달려 있는 모습, 그럼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어쩌면 고집이라기보다 오기였고, 혹은 미련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련 속에는,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조용한 결의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제임스는 문득, 그것이 더 이상 ‘비닐하우스 짓기’가 아니라 그녀 자신과의 싸움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 낯선 땅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일구어 내고 싶어 하는 욕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흙에 손을 묻히는 삶을 기어코 살아내려는 의지. 그 모든 것이 수잔을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미련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경이로워 보이는 그녀였다.
제임스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그녀의 고생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두터운 작업 장갑을 나무 더미 위에 걸치듯 내려놓았다. 거친 나뭇결에 손이 찔려 아린 듯한 얼굴로 못을 박던 그녀 옆에 앉으며,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 보자…”
그는 구부러진 못을 뽑아내고 새 못을 건넸다.
“이러다 비닐하우스가 삐딱해지겠는데요? 잠깐만요, 제가 좀 봐도 되죠?”
“괜찮아요.”
“알아요. 괜찮다는 거…”
그는 망치를 쥐어주며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망치질은 또 빗나갔고, 제임스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안쓰러워 보이는 거, 말해도 돼요?”
수잔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말 안 하고 도와주면 안 돼요?”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기둥을 세우고 못을 고정하고, 그 위로 비닐을 씌우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 무렵, 비닐하우스는 비로소 형태를 갖춰 갔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수잔은 잠시 제임스를 바라봤다. 흐뭇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깐 집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왔을 때, 제임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고 장갑 한 켤레만 나무 더미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수잔은 그 장갑을 바라보며 그의 큰 손이 왠지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수잔은 문득 제임스가 웃던 모습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가 흘렀다.
그동안 몰랐던 감정이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면서도, 어딘가 설레는 느낌.
퇴근길, 수잔은 평소와 달리 들뜬 마음으로 화장품 매장 앞에 섰다.
립스틱과 마스카라를 고르며 몇 번이나 진열대 앞에서 망설였다.
낯선 자신이 어색해, 결국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뛰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지 못하게.
‘이게 뭐라고…’
거울 앞에 선 수잔은 진달래빛 립스틱을 조심스레 입술에 그리고, 손끝으로 살짝 덧발랐다.
익숙하지 않은 손길, 생기 있는 입술, 어색한 얼굴.
제임스의 자동차가 완성되고 첫 시승을 위해 드라이브를 간 날, 그때 느꼈던 바람과 햇살,
“괜찮아요? 바람이 세지 않아요?”
제임스가 운전대 너머로 물었고, 수잔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바람이 옷자락과 머리칼을 휘감고, 햇살이 목덜미를 스치던 따스한 순간. 작은 웃음과 긴장이 뒤섞였던 그 장면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I’m free!”라고 허공에 소리치며 웃던 제임스.
그녀도 차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Freedom!”, 마음껏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은 어색한 웃음과 작은 목소리뿐이었다.
그녀를 이해하듯, 그의 눈동자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잠깐 멈춘 찰랑이던 호수 앞에서 미소 짓는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제임스가 말했다.
“뚜껑이 없어서 불편했죠? 다른 차랑 똑같아 보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비 오면 어떻게 해요?” 수잔이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러게요? 비 맞은 생쥐 같으려나? 하하.”
순간, 비에 젖은 그의 모습이 떠올라 수잔은 깔깔 웃었다.
‘제임스 때문일까, 아니면 나 자신 때문일까?’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마음, 잊고 있던 호기심, 바람과 햇살, 자유로운 순간들이 스스로를 들뜨게 했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막 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억눌려 있던 자신 안의 감정이 해방되려는 것일까.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수잔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햇살에 녹아 반짝이는 호수 위 물결처럼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했다.
어쩌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바람을 찾는 까닭을 굳이 묻지 않듯이, 잔잔하고 평온한 삶을 바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의 오늘이, 푸른 들판을 거니는 듯 따뜻하고 평온하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