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23화
"어, 안녕하세요?"
지훈이었다.
"이젠 여기서 일해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놀람과 어색함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네…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려서 죄송해요. 몇 번이나 연락하려 했는데…"
수잔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변명인지, 사과인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차분했다.
줄 서 있던 손님이 성가시다는 듯 지훈을 툭 밀쳤다. 그는 서둘러 버드와이저 6팩을 계산대에 올리고, 잔돈은 남긴 채 멋쩍게 웃으며 문을 나섰다.
그 순간,
수잔은 그를 붙잡고 싶어졌다. 설명할 수 없는 충동. 마치 지금 놓치면 다시는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급히 문을 열고 뛰쳐나갔지만, 지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잠시 그가 사라진 길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왜 늘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게 되는 걸까.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계약됐어요! 집주인이 수잔 얘기를 듣더니, 이민자라 더 싸게 주겠다네요. 축하해요!”
내 집을 샀다.
처음으로 내 집이 생겼다.
고대하던 소식에 허전하던 마음이 스르르 사라지고, 대신 짜릿한 기쁨이 몰려왔다. 대출과 보험, 끝나지 않은 서류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모든 수고를 견디게 하는 이 집은, 낯선 땅에서 수잔이 처음으로 선택한 가족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바닥은 발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울렸고, 그 사이사이에 스민 나무 냄새가 공기 속에 가득 퍼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숲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집 전체가 마치 뿌리내린 생명체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세모난 지붕과 먼지가 내려앉은 다락방. 창 너머 은빛 호수는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고, 지붕 위를 스치는 바람과 빗소리는 집이 그녀를 포근히 감싸는 듯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 발 비켜서 있는 곳. 이제야 비로소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것이다. 이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그녀는 이곳을 ‘숲속집’이라 불렀다. 긴 여정 끝에 찍은 쉼표 같은,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집.
사장은 잔디깎이를 선물했고, 폴과 마리아는 거라지 세일에서 낡고 작은 가구들을 건져와 하나둘 방 안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모인 것들이 어울려, 집은 어느새 그녀가 어린 시절 마음속에 그려 두었던 작은 종이 인형의 집처럼 변해갔다.
평일에는 마리아와 함께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쉬는 날이면 마을을 지나 한 시간 반을 달려 숲속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라, ‘자신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메워야 할 대출금은 발목을 붙들었고, 자유는 언제나 값비싼 빚쟁이처럼 대가를 요구했다. 결국 수잔은 호텔에서 하우스키퍼로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다. 쉬는 날엔 식당에서 디시워셔로 시간을 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을 샀지만 정작 그 집에 머물 시간은 점점 사라져 갔다. 바쁘게 움직일수록 과연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초조가 마음을 잠식했지만, 돈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때 마리아가 임대를 제안했다. 반신반의하며 광고를 내자, 하루 만에 ‘제임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연락을 해왔다.
제임스는 아파트에 살아 차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손쉽게 임대가 성사되었고, 방 하나에는 워홀 비자로 온 한국 청년 K가 머물렀다. 수잔은 처음으로 ‘임대수익’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잔고가 조금 불어나는 걸 확인했을 때,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짓눌리기만 하던 자신에게도 작은 숨구멍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K는 두 달 만에 마을과의 거리 때문에 떠났고, 몇 달째 차고를 쓰고 있던 제임스에게서 수잔은 문득 묘한 수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차를 만든다고 했다. 공장도 아닌 차고에서, 혼자서.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처음엔 주말에만 오던 그가 이제는 평일에도 트럭으로 무거운 부품을 날라 와, 밤늦도록 기계음을 울려댔다. 수잔의 마음속에는 경계와 함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넘어, 어느덧 2월. 몇몇 집 창가엔 아직도 화려한 전등이 깜빡였다. 지나간 계절을 붙잡으려는 듯, 잊힌 추억이 불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수잔은 생각했다. 이제 장식을 거둬야겠다고. 그래야 비로소 봄이 올 것 같았다.
다음 날 저녁, 폴과 마리아, 리아가 찾아왔다. 그들의 웃음소리로 집 안은 금세 환해졌다. 조금 늦게 온 제임스도 어색함 없이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했고 맥주와 음식, 농담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그날 밤, 제임스가 광산에서 일한다는 것을 들었다. 중학교 이후 학교에 간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리고 여섯 살 된 딸이 나라 반대편에 살고 있어 자주 보지 못한다고... 그 말들을 내뱉는 그의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마치 무거운 삶조차 부끄럽지 않은 듯.
수잔은 잠시 놀랐다. 언뜻 평범해 보였던 그가 광부라니... 그러나 더 믿기지 않았던 건, 그의 솔직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 낸다는 것이 늘 망설여졌고, 어쩌면 숨기는 것에 더 익숙했지만, 그는 거칠고 굳은 손으로 자신의 삶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게 어쩐지 부럽기도 했다.
“저 차는 제 꿈이에요. 완성되면, 캐나다를 횡단할 겁니다.”
제임스의 말에 리아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이야, 멋지다!”
제임스는 쑥스러운 듯 웃었고, 마리아는 장난스럽게 수잔을 끌어들였다.
“수잔도 여행 좋아하잖아. 같이 가면 되겠네.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 간다고 했다가 사고 나서…”
수잔이 얼른 그녀의 입을 막자, 모두가 깔깔 웃었다.
시간은 이상한 것이었다. 한때는 그렇게 절실했던 것들이 차츰 흐릿해지고 파도가 밀려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또 다른 물결이 밀려왔다.
마리아가 기타를 꺼내 노래를 부르자, 밤은 점점 깊어지고, 아득해졌다.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제임스는 낮에 마주했던 수잔의 슬픈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 오후, 저녁 모임을 준비하던 셋은 함께 마트에 들렀고, 장을 본 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리자, 지훈이 들어섰다. 작은 마을은 늘 이렇게, 예고 없이 누군가와 마주치게 했다.
“어머, 지훈.”
리아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불렀다.
“또 보네요! 같이 앉아요.”
잠시 망설이던 지훈이 자리에 앉자, 제임스의 시선이 수잔을 스쳤다.
“제임스예요.”
수잔이 약간 주춤하며 말을 이었다.
“여긴, 지훈 씨… 친구예요.”
“반갑습니다.”
짧은 인사와 악수. 순간,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리아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떠들었다.
“이렇게 넷이 앉아 있으니까, 여행 온 기분이네요. 그렇죠?”
하지만 그 순간은 여행 같지 않았다. 지훈의 시선이 수잔을 스쳤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예전과 달랐다. 더 차분했고, 더 낯설었다.
지훈이 잠시 망설이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삐걱이는 의자가 내는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울리며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수잔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손끝은 오히려 차갑게 떨렸다.
“저… 결혼해요. 몇 달 후예요.”
지훈의 목소리는 낮게, 그러나 똑똑히 공기 속에 새겨졌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테이블 위 네 잔의 커피에서 흘러나온 하얀 김만이 느리게 피어올랐다.
“축하해요.”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낯선 사람의 말처럼 어색하게 들렸다.
지훈은 자신도 왜 그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심어주듯 무심코 흘린 고백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축하 인사는 이상하게 멀리서 울려오는 메아리처럼 가슴을 찔렀다. 더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말했다.
“건강하세요.”
창밖 유리창에 그의 그림자가 잠시 어른거리다 햇빛 속으로 스며 사라졌다.
결혼.
한때는 자신을 찾아 눈길을 달려와주던 지훈. 따뜻했던 그의 손.
수잔은, 가끔은 그 손을 잡고 숲길을 걷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함께 웃고 있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
그가 결혼한다니…
마음속으로는 ‘잘된 일’이라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가 떠난 문 쪽을 향했다. 마치, 그가 다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제임스는 그들 사이에 흘러든 묘한 긴장을 느꼈다. 한국말은 알 수 없었지만 침묵이 길게 드리우며 가라앉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녀의 움츠린 작은 어깨, 나직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잠깐의 술기운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제임스는 그 순간 수잔이 왠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단순한 걱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쩌지 못할 저릿한 감정이 가슴 한쪽을 파고들었고, 그는 그 슬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늘만큼은 이 순간이 쉽게 꺼지지 않기를, 그 웃음이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